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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보드 위에 있는 게 제 손인 건 알아요. 그런데 남의 손을 내려다보는 것 같아요. 제 목소리도 누가 녹음해서 옆에서 틀어 주는 소리처럼 들리고요. 이러다 제가 없어지는 건 아닐까 무서워요.”
회계팀에서 일하는 서른세 살 남성분이 상담을 신청하며 한 말입니다. 결산 마감을 앞두고 사흘째 야근하던 밤, 모니터의 숫자를 맞춰 보다가 갑자기 화면이 한 걸음 뒤로 물러난 듯 멀어졌습니다. 귀가 먹먹하고 목덜미가 서늘해졌으며, 동료에게 대답하는 자기 목소리마저 머리 밖에서 울리는 것 같았습니다.
그날 이후 퇴근길 지하철 창에 비친 얼굴이 낯설고, 횡단보도 앞의 차들이 영화 속 장면처럼 보이는 일이 되풀이됐습니다. 그럴 때마다 손등을 세게 꼬집고, 회사 화장실 거울 앞에서 자신의 얼굴을 오래 확인했습니다. 목소리가 또 낯설게 들릴까 봐 회의에서는 말을 아끼게 됐습니다.
익숙한 내 몸과 세상이 낯설어질 때
내 몸이나 생각, 목소리가 내 것 같지 않게 느껴지는 것을 이인증이라고 합니다. 주변 사람과 풍경이 꿈이나 영화 속 장면처럼 멀게 느껴지는 것은 비현실감입니다. 처음 생겼거나 점점 잦아져 생활에 지장을 준다면 진료를 통해 다른 원인과 함께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분은 손이 실제로 다른 사람의 손이 됐다고 믿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낯설게 느껴진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이러다 내가 없어지는 것은 아닐까’ 두려웠습니다. 그 두려움 때문에 손과 얼굴을 거듭 확인했고, 확인할수록 낯선 감각에 더 오래 주의가 붙들렸습니다.
괜찮다고 되뇌어도 몸이 먼저 멀어졌습니다
신경과 검사와 정신건강의학과 진료를 받고, 커피를 끊고 잠도 일찍 청했습니다. 느낌이 찾아오면 괜찮다고 되뇌었습니다. 그래도 결산 기간처럼 일이 몰리면 생각보다 먼저 팔이 굳고 화면과 자신의 목소리가 멀어졌습니다.
충분히 깊은 최면상태에 들어간 뒤, 화면이 멀어지기 직전에 올라오는 두려움과 팔이 굳어 꼼짝할 수 없을 것 같은 답답함에 집중했습니다. 그 감정과 신체감각을 따라가자, 누런 꽃무늬 벽 앞에 서 있는 어린 시절의 장면이 연결되어 나타났습니다.
움직이지 말라는 말 앞에서 손만 바라보던 아이
혼자 양말도 제대로 신지 못하던 무렵의 아이가 방 벽 앞에 서 있었습니다. 뒤에서는 어른의 꾸중이 길게 이어졌고, “움직이지 말고 가만히 서 있어”라는 말이 거듭 들렸습니다. 아이는 두 팔을 몸에 붙인 채 꼼짝하지 않았습니다.
울면 더 혼날 것 같아 소리도 내지 못하고 고개를 숙여 두 손만 바라봤습니다. 꾸중이 끝나지 않자 손가락은 분명 그 자리에 있는데도 조금씩 멀게 보였고, 마치 남의 손처럼 느껴졌습니다. 뒤에서 들리던 목소리도 먼 방에서 울리는 것처럼 작아졌습니다. 움직이거나 울 수도 없었던 아이에게는 몸을 굳히고 자신의 감각을 멀리하는 것이 긴 꾸중을 견디는 방법이었습니다.
성인이 된 뒤에도 압박이 커지면 같은 반응이 되풀이됐습니다. 어린 시절에는 꼼짝하지 못한 채 손만 바라보다 손과 목소리가 멀어졌고, 지금은 결산 업무가 몰리면 팔이 굳은 뒤 손과 화면, 자신의 목소리가 낯설어졌습니다. 손등을 꼬집고 거울을 보는 행동은 그 낯선 느낌을 계속 확인하게 만들었습니다.
최면 속에서 어른이 된 그분은 아이의 눈높이에서 말했습니다. “움직이지 못하고, 울면 더 혼날까 봐 손만 보며 오래 버텼구나. 손이 멀게 느껴져도 네가 없어지는 것은 아니야. 그때는 꾸중이 끝날 때까지 가만히 있어야 했지만, 지금의 나는 압박이 올라와도 손을 확인하느라 멈추지 않고 하던 일을 이어 갈 수 있어.”
같은 장면을 다시 지나갈 때도 꾸중은 길었고 아이는 벽 앞에 서 있었습니다. 그러나 손이 잠깐 멀게 보여도 자신이 사라지는 것으로 받아들이지 않았고, 숨도 멈추지 않고 계속 쉬었습니다. 아이는 낯선 감각이 올라온다고 해서 그 감각을 끝까지 확인하며 버틸 필요는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됐습니다.
최면 중에는 압박 속에서 몸을 굳히고 낯선 감각에 붙들려 있던 다른 관련 경험들도 이어 다뤘습니다. 현재의 자신은 낯선 느낌이 스쳐도 위험을 확인하느라 멈추지 않고 하던 일을 이어 갈 수 있다는 이해로 그 경험들을 소화해 나갔습니다.
손을 확인하는 대신 다음 숫자를 입력했습니다
다음 결산 마감 주에도 밤 아홉 시가 넘자 화면이 한순간 뒤로 물러나는 듯했습니다. 예전 같으면 손등을 꼬집고 화장실 거울로 달려갔을 순간이었습니다. 이번에는 긴장이 올라온 것을 알아차렸지만 손을 확인하지 않고 다음 칸의 숫자를 입력했습니다. 그 행의 합계를 맞출 즈음 화면은 원래대로 돌아와 있었습니다.
그 주에는 처음 결산을 맡은 후배가 서류 더미 앞에서 쩔쩔매고 있었습니다. 그분은 후배 옆에 앉아 대조하는 순서를 하나씩 짚어 주었습니다. 한참 설명하는 동안에도 자기 목소리가 어디에서 들리는지 확인하지 않았습니다.
달라진 것은 낯선 느낌이 다시는 나타나지 않았다는 것이 아닙니다. 압박이 오면 감각을 확인하느라 멈추던 반응에서 벗어나, 그 느낌이 스쳐도 하던 일을 이어 갈 수 있게 된 것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