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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배가 제 공 주우러 마운드 뒤로 뛰어가는 걸 보면 숨이 턱 막혀요. 선배는 웃으면서 괜찮다고 하는데, 그 말을 들으면 다음 공은 더 못 던지겠어요. 미트에서 공을 꺼내 쥐면 팔꿈치가 굳어서 안 펴지고, 공이 선배 머리 위로 뜨거나 발 앞에 박혀요.”
투수가 던진 공이 미트에 들어온 뒤 다시 투수에게 돌아가기까지, 그 몇 초가 대학 1학년 포수에게는 경기에서 가장 길었습니다. 주자가 있을 때는 더욱 그랬습니다. 공을 쥔 손에 땀이 배고 팔꿈치가 굳어, 투수의 가슴을 향해야 할 공이 높이 뜨거나 발 앞에 떨어졌습니다. 선배 투수가 공을 쫓아갈 때마다 목이 움츠러들었고, 투수와 가까이 마주하는 마운드 방문도 되도록 피했습니다.
시작은 대학 첫 시즌의 봄 리그였습니다. 1사 2루에서 돌려준 공이 선배 투수의 글러브 끝을 맞고 마운드 뒤로 튀었습니다. 선배가 공을 쫓아가는 사이 2루 주자는 3루까지 갔습니다. 선배는 공을 주워 들고 “괜찮아, 신경 쓰지 마” 하며 웃었습니다. 바로 다음 공부터 팔이 굳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더그아웃에서는 ‘쪼당 온 거 아니냐’는 말이 들려왔습니다. 동기들은 그냥 던지면 되지 않느냐고 했고, 선수도 무슨 뜻인지 알았습니다. 하지만 반환 송구 입스는 남들 눈에 별일 아닌 것처럼 보여 혼자 끙끙 앓기 쉽습니다. 선배가 괜찮다고 웃어 주었는데도 왜 다음 공부터 팔이 굳었을까요?
쉬고 와도 다시 뜨는 공
선수는 여러 방법을 써 봤습니다. 송구 폼을 영상으로 찍어 코치와 함께 살폈고, 한 주 동안 공을 잡지 않고 쉬기도 했습니다. 잠들기 전에는 공이 투수의 가슴으로 곧게 뻗어 가는 모습을 그려 봤습니다. 그래도 쉬고 난 첫 훈련에서 선배에게 돌려준 공은 다시 높이 떴습니다.
폼 점검은 흐트러진 동작을 바로잡고, 휴식은 지친 몸을 회복하는 데 도움이 됩니다. 이미지트레이닝으로 좋은 송구를 그려 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 선수는 한 주를 쉬고 나서도 선배에게 돌려주는 첫 공이 떴습니다. 팔이 굳는 순간에 무엇이 마음을 무겁게 하는지도 살펴볼 필요가 있었습니다.
동기 투수에게 돌려줄 때는 공이 곧게 갔습니다. 선배에게 던질 때 숨이 막혔고, 주자가 있어 공 하나가 빠지면 진루로 이어질 수 있는 이닝에서는 더 심했습니다. 같은 반환 송구인데도 받는 사람과 상황에 따라 달라졌습니다. 선수에게는 공이 빠져 선배가 또 뛰어가야 할지 모른다는 미안함이 먼저 올라왔습니다.
기억나지 않아도 올라오는 미안함
어떤 경험은 일어난 일을 또렷이 떠올리지 못해도, 비슷한 상황에서 느꼈던 감정이나 몸의 반응이 먼저 나타날 수 있습니다. 이런 기억의 측면을 설명할 때 ‘암묵기억’이라는 말을 씁니다. 당시 장면이 기억나지 않아도 특정 순간에 가슴이 답답하거나 손에 힘이 들어가는 식입니다.
이를테면 새 학기 첫날 처음 만난 선생님이 이름을 부르는 말투에 이유 없이 긴장할 수도 있습니다. 무슨 일이 떠오른 것은 아닌데 몸이 먼저 반응하는 것입니다.
이 선수는 선배에게 공을 돌려주려 할 때 그랬습니다. 공이 빠지면 선배가 뛰어가야 한다는 생각에 가슴이 답답해졌고 곧 팔꿈치가 굳었습니다. 동기들이 “그냥 던져”라고 할수록 ‘이번에도 빠지면 또 선배를 뛰게 한다’는 생각이 먼저 들었습니다.
최면 속에서 처음 나온 말
최면상담에서는 기억을 억지로 찾기보다, 지금 공을 건네려 할 때 가슴이 답답해지는 느낌에서 시작합니다. 깊은 최면 중 그 느낌과 함께 평소 떠올리지 않던 경험이 생각나기도 합니다. 상담에서는 떠오른 경험뿐 아니라 당시의 감정과 몸의 반응을 함께 살펴봅니다.
최면이 깊어지는 동안 선수는 좀처럼 말을 꺼내지 못했습니다. 선배가 공을 쫓아 뛰어가던 뒷모습을 떠올리자 숨이 짧아졌습니다. 한참 뒤 처음 꺼낸 말은 뜻밖에도 “실이 너무 많아요”였습니다.
아직 엄마 등에 업혀 할머니 댁을 오가던 어린 시절이었습니다. 아이는 할머니가 뜨던 털실 끝을 쥐고 방 안을 돌아다녔습니다. 잡아당길수록 실이 계속 따라 나오자 신이 나서 장롱 앞과 문지방 사이를 몇 번이고 오갔습니다. 어느새 털실이 방바닥과 방석, 밥상 다리까지 얽혀 있었습니다.
할머니는 뜨개바늘을 내려놓고 엉킨 실을 한 가닥씩 풀기 시작했습니다. “아이고, 이걸 언제 다 푸나.” 긴 한숨이 들렸습니다. 아이는 할머니 곁에 앉아 두 손을 무릎 위에 포갠 채 손가락 하나 움직이지 못했습니다.
선수에게 또렷했던 것은 엉킨 털실, 무릎 위에 포개 놓은 두 손, 할머니의 긴 한숨이었습니다. 반면 할머니 무릎 위에 있던 뜨개질감은 상담을 마칠 때까지 흐릿했습니다. 조끼였는지 목도리였는지는 알 수 없었습니다.
선수는 최면 속에서 어린 자신 옆에 쪼그려 앉았습니다. 할머니가 실을 한 가닥씩 풀고 있는 모습을 함께 보며, 한숨을 쉬었다고 해서 아이를 탓한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고 알려 주었습니다. 실 끝을 잡고 방 안을 돌아다닌 것은 아이에게 재미있는 놀이였다는 점도 짚었습니다. 실이 엉켰다면 어른에게 함께 풀어 달라고 말할 수 있고, 누군가 수고하게 됐다고 해서 두 손을 묶듯 가만히 있어야 하는 것은 아니라고 알려 주었습니다.
그 말을 들은 아이는, 할머니의 한숨이 자신을 탓하는 뜻은 아닐 수 있다는 사실을 마음에 둔 채 그 오후를 다시 겪어 보았습니다. 털실은 여전히 온 방에 엉켰고 할머니도 똑같이 한숨을 쉬었습니다. 아이는 할머니 곁에서 두 손을 무릎 위에 포개고 앉아 있었습니다. 이번에는 할머니가 실을 한 가닥씩 풀어 내는 손길도 눈에 들어왔다고 합니다. 꼭 맞붙어 있던 두 손은 조금 느슨해졌습니다.
할머니가 아이를 나무라지는 않았습니다. 하지만 아이는 자신이 어질러 놓은 실을 할머니가 오래 풀어야 한다는 생각에 미안했고, 두 손을 포갠 채 꼼짝하지 못했습니다. 선배 투수가 자신의 공을 주우러 뛰어갈 때도 그 미안함이 떠오르며 팔이 굳는다는 점을 상담에서 함께 살펴봤습니다. 선배의 “괜찮아”라는 말만으로는 공을 쥐는 순간의 긴장이 쉽게 가라앉지 않았습니다.
상담에서는 이 장면과 함께, 자신의 행동이 다른 사람에게 폐가 됐다고 느끼며 몸을 굳혔던 관련 경험들도 이어서 다뤘습니다.
마운드로 걸어 올라간 날
가을 리그 경기에서 주자가 1, 2루에 나가 있던 이닝, 선수가 돌려준 공은 선배 투수의 가슴 쪽으로 들어갔다고 합니다. 한 번은 공이 조금 높게 떠 선배가 발을 떼어 받았지만, 다음 공을 쥐었을 때 팔꿈치는 굳지 않았습니다. 볼이 두 개 이어지자 선수는 타임을 부르고 마스크를 벗은 채 마운드로 걸어갔습니다.
선배의 글러브를 툭 치고 다음 공의 사인을 맞춘 뒤 홈으로 돌아왔다고 합니다. 그 이닝에는 선배가 공을 받으려고 뛰어갈 일이 없었습니다.
공을 돌려줄 때마다 투수가 또 뛰어가게 될까 봐 손에 땀이 나는 포수라면, 송구 폼과 함께 그 순간 어떤 마음이 드는지도 살펴볼 수 있습니다. 집에서도 야구 이야기를 꺼내지 않는 아들을 보며 걱정하는 부모님도 계실 것입니다. 이 선수에게는 동료에게 또 폐를 끼칠까 하는 마음이 큰 부담이었습니다.
“괜찮아”라는 말을 들어도 팔이 굳는다면, 그 순간 먼저 올라오는 감정과 몸의 반응이 무엇인지 살펴보는 데서 상담을 시작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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