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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대 공격수가 공을 몰고 속도를 올리는 게 보이면, 공이 저한테 오기도 전에 무릎이 꺾일 것처럼 힘이 빠져요. 종아리도 후들거리고요. 반 박자만 빨리 움직이면 되는데 첫발이 안 나가요. 체력이 떨어져서 그런 줄 알고, 훈련이 끝나면 혼자 운동장을 열 바퀴씩 더 뛰었어요.”
팀 트레이너가 체력 측정 결과지를 건네며 말했습니다. “체력은 작년보다 오히려 좋아졌어.” 대학 4학년 중앙 수비수인 그는 그 말을 듣고 더 막막해졌다고 합니다. 셔틀런(왕복 달리기) 기록도 하체 근력도 떨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경기 때마다 풀리는 다리는 무엇 때문일까요?
다리가 처음 말을 듣지 않은 날은 프로 구단 스카우트가 관중석에서 지켜보던 대학리그 경기였습니다. 1대1로 맞선 상대 공격수가 드리블로 속도를 올려 파고들자, 뒷걸음을 치려던 그의 무릎에서 힘이 빠졌습니다. 반 박자 늦은 사이 옆으로 빠져나간 공격수의 슛이 골문에 꽂혔고, 그 골이 결승골이 되었습니다.
그 뒤로도 상대가 속도를 올려 파고드는 1대1 수비 장면이면 다리가 먼저 풀렸습니다. 처음 몇 경기는 옆 수비수가 빈 곳을 메워 준 덕에 코치도 눈치채지 못했습니다. 여럿이 함께 뛰는 축구에서는 동료가 대신 막아 주는 동안 이런 어려움이 겉으로 드러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연습 때는 멀쩡한데 경기의 특정 순간에만 몸이 말을 듣지 않았습니다.
공 없이 뛸 때는 가벼운 다리
그는 체력이 모자라거나 수비 위치를 잘못 잡는 건 아닌지, 혹은 자신이 겁이 많은 건 아닌지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공 없이 달리거나 패스를 주고받을 때는 다리가 가벼웠습니다. 경기 초반, 숨도 차지 않았는데 상대가 치고 들어오는 순간이면 무릎이 풀렸습니다. 체력 측정 결과보다 1대1 수비에서 몸이 언제 어떻게 반응하는지를 살펴볼 필요가 있었습니다.
상대가 가까이 달려들 때 몸은 생각보다 먼저 위협을 느끼고 순간적으로 멈출 수 있습니다. 이때는 머리로 움직여야 한다고 알아도 첫발이 늦어질 수 있습니다. 그에게는 상대 공격수가 속도를 올리는 순간 무릎과 종아리에서 힘이 빠지는 식으로 나타났습니다.
이처럼 특정 순간에만 첫발이 늦는 반응은 운동능력만으로 설명하기 어려웠습니다. 그에게는 상대가 빠르게 다가온다는 상황이 특히 중요했습니다.
운동량을 늘리자 체력은 좋아졌고, 수비 위치 훈련으로 상대와의 간격을 읽는 눈도 길렀습니다. 둘 다 수비수에게 필요한 훈련이었습니다. 그런데 상대가 달려드는 순간의 다리 반응은 그대로였습니다.
“경기 전에 ‘붙어서 막자’를 속으로 몇 번이나 되뇌었는지 몰라요. 그런데 상대가 치고 들어오는 순간엔 그런 다짐은 온데간데없고 무릎부터 풀려요.”
경기 전에는 움직일 수 있을 것 같아도 상대가 파고들면 다리가 먼저 풀렸습니다. 최면상담에서는 의식을 유지한 채 깊이 집중해, 경기에서 다리가 풀리던 느낌을 따라 떠오르는 경험과 감정을 살펴봤습니다.
“아빠가 쫓아와요”
깊은 최면 상태에서 결승골을 내주던 1대1 장면을 떠올리자 무릎이 휘청하고 종아리에서 힘이 쑥 빠지는 느낌이 났다고 합니다. 무릎이 꺾일 것 같다는 말을 몇 번 되풀이하던 그가 뜻밖의 말을 꺼냈습니다. “아빠가 쫓아와요. 저는 웃으면서 도망가고 있어요.”
몇 걸음 뛰다 넘어지기 일쑤인 사내아이가 빨랫줄이 걸린 집 마당을 뛰어다닙니다. 뒤에서 아빠가 “잡으러 간다아!” 하며 성큼성큼 따라옵니다. 아이는 소리를 지르며 깔깔대고, 짧은 다리로 마당을 가로지릅니다.
아빠의 발소리가 바로 뒤까지 다가오고 커다란 그림자가 아이 앞 땅에 드리우자, 웃음이 뚝 끊깁니다. 조금 전까지 놀이로 여겼던 아빠의 걸음이 그 순간엔 무섭게 느껴진 것입니다. 아이는 무릎에 힘이 풀려 엉덩방아를 찧듯 주저앉아 울음을 터뜨립니다. 놀란 아빠가 달려와 아이를 안아 올립니다.
어른이 된 그는 흙바닥에 주저앉아 우는 어린 자신에게 말해 주었습니다. “아빠는 너를 잡으면 품에 안으려고 따라온 거야. 둘이서 하는 놀이야. 다리에 힘이 빠져 주저앉아도 넌 다치지 않아. 울어도 아빠가 바로 옆에 있어.”
그 말을 들은 아이는, 아빠가 자신을 잡아 안으려는 놀이라는 사실을 마음에 둔 채 마당에서 뛰던 일을 다시 겪어 보았습니다. 아빠는 다시 “잡으러 간다아!” 하며 뒤따라왔습니다. 발소리가 가까워지자 아이는 주저앉아 울었고, 아빠가 달려와 안아 올렸습니다. 일어난 일은 처음과 같았습니다.
이번에는 아빠가 자신을 잡아 안으려는 놀이였다는 걸 알았습니다. 울음은 금세 훌쩍임으로 바뀌었고, 아이는 아빠 목에 뺨을 댄 채 몸을 맡겼습니다. 장면이 끝나자 그가 먼저 말했습니다. “종아리에 힘이 다시 들어와요. 발바닥으로 바닥을 딛고 있는 게 느껴져요.”
아빠와 놀던 아이는 발소리가 바로 뒤에서 들리자 겁이 났고, 달아나던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았습니다. 스카우트가 지켜보던 경기에서도 상대가 속도를 올려 다가오는 순간 다리부터 풀렸습니다. 상담에서는 이 두 장면에서 닮은 몸의 반응을 함께 살펴봤습니다.
이 장면뿐 아니라, 가까이 다가오는 움직임 앞에서 겁이 나 몸이 멈췄던 관련 경험들도 이어서 살폈습니다.
1대1 수비 시범에 먼저 나선 날
결승골을 내준 뒤 그는 1대1 수비 시범을 늘 다른 선수에게 미뤘습니다. 요즘은 코치가 저학년 수비수들 앞에서 시범을 보일 사람을 찾으면 먼저 나선다고 합니다. 공격수 역할의 후배가 속도를 올려 들어오면 뒷걸음으로 간격을 맞추고 몸을 비스듬히 세워 측면으로 몰아냅니다.
리그 경기에서도 변화가 있었다고 합니다. 상대 공격수가 측면에서 드리블로 치고 들어오자 그는 뒤로 물러나며 간격을 맞췄습니다. 무릎은 끝까지 버텨 주었고, 공이 공격수 발끝에서 살짝 멀어지자 태클로 걷어 냈습니다.
경기 때마다 다리가 풀리면 선수도 지켜보는 부모님도 체력이나 성격부터 탓하기 쉽습니다. 하지만 훈련 때는 가볍던 다리가 상대가 빠르게 다가오는 순간에만 풀린다면, 그 순간 몸에 어떤 긴장이 찾아오는지 살펴볼 만합니다. 익혀 둔 발놀림이 사라진 게 아닙니다. 필요한 순간에 다리가 먼저 멈췄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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