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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면제를 먹으면 자긴 자요. 그런데 안 먹은 날은 또 그대로예요.
새벽 두세 시까지 천장만 보다가 겨우 잠들면 아침이고요.
병원을 더 다녀야 하나, 약을 바꿔야 하나, 아니면 상담 같은 걸 받아야 하나…
도대체 어디서부터 손을 대야 할지 모르겠어요.”
마흔 후반의 한 분이 센터를 찾아 이렇게 털어놓으셨습니다. 잠 못 드는 밤이 벌써 이태째라고 하셨습니다. 낮 동안은 온몸이 천근만근 무거운데, 막상 불을 끄고 누우면 거짓말처럼 정신만 또렷해지는 날이 이어졌습니다. 그렇게 천장을 보며 시간을 보내다 보면, ‘오늘도 못 자면 어쩌나’ 하는 조바심까지 얹혀 머리가 더 환해졌습니다.
이런 분들이 가장 막막해하는 대목은 증상 그 자체가 아닙니다. 불면증 치료를 검색해 보면 길이 너무 여러 갈래라는 점입니다. 수면제 이야기가 나오고, 수면클리닉 검사 이야기가 나오고, 상담이나 최면 이야기도 나옵니다. 다들 맞는 말 같은데, 정작 ‘나는 무엇부터 해야 하나’에 이르면 답이 잘 보이지 않습니다.
먹으면 잠들지만, 끊으면 다시 돌아옵니다
그래서 가장 먼저 약을 떠올리게 됩니다. 실제로 수면제는 불면증 치료에서 분명한 제 역할이 있습니다. 곤두선 각성을 가라앉혀 그날 밤 잠들도록 도와주고, 못 자는 밤의 강도와 빈도를 줄여 줍니다. 며칠씩 한숨도 못 자 일상이 무너질 지경일 때, 약은 큰 힘이 됩니다.
다만 약을 먹어 본 분들이 입을 모아 하는 말이 있습니다. 먹으면 자는데, 끊으면 처음으로 돌아간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약을 평생 먹어야 하나’ 하는 또 다른 걱정이 생깁니다. 왜 이런 일이 벌어질까요. 답을 찾으려면, 약이 무엇을 다루고 무엇은 다루지 못하는지부터 짚어야 합니다.
눕기만 하면 몸이 깨는 데는 까닭이 있습니다
여기서 한 가지 알아 둘 것이 있습니다. 잠을 못 자는 밤이 거듭되면, 우리 몸은 ‘침대’와 ‘긴장’을 한 짝으로 묶어 기억합니다. 심리학에서는 이렇게 원래 상관없던 두 가지가 반복으로 짝지어지는 것을 ‘조건화’라고 부릅니다. 말은 어렵지만 우리 일상에 흔한 일입니다.
이를테면 누군가와 늘 같은 카페에서 다투기만 했다면, 나중엔 그 카페 문을 여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답답해집니다. 카페에는 아무 잘못이 없는데, ‘그 자리’가 ‘불편함’과 짝지어진 탓입니다. 잠자리도 똑같습니다. 잠 못 든 밤이 쌓이는 사이, 침대는 어느새 ‘쉬는 자리’가 아니라 ‘깨어 경계하는 자리’로 새겨집니다. 그래서 눕기만 하면 의도와 상관없이 몸이 저절로 깨어납니다.
이제 약이 무엇을 하는지가 분명해집니다. 수면제는 이 곤두선 각성을 화학적으로 가라앉혀 줍니다. 그날 밤은 잠들 수 있습니다. 그러나 ‘침대와 긴장’이라는 그 짝지음 자체는 손대지 못한 채 그대로 남습니다. 그러니 약을 줄이면, 잠시 눌려 있던 그 연합이 다시 고개를 듭니다. 약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약이 닿는 자리가 거기까지이기 때문입니다.
더 중요한 사실이 있습니다. 이 짝지음은 우리가 마음먹는다고 풀리는 자리에 있지 않습니다. ‘오늘은 편하게 자야지’ 하고 아무리 다짐해도, 누우면 몸은 또 깨어납니다. 의지가 약해서가 아닙니다. 이 반응은 의식적으로 켜고 끄는 것이 아니라, 의식보다 깊은 자리에서 저 혼자 작동하도록 학습된 것이기 때문입니다. 약도 의지도 그 자리까지는 내려가 닿지 못합니다.
약도 의지도 닿지 못한 그 자리로
최면상담이 들여다보는 자리가 바로 거기입니다. 의식이 손대지 못하는 그 깊은 자리로 내려가, 몸이 언제부터 ‘쉬는 것’을 위험으로 여기게 됐는지 그 시작점을 찾아가는 것입니다. 침대를 긴장과 묶어 버린 첫 매듭을 찾아 풀어 주는 일입니다.
앞서 그 마흔 후반의 분도 그렇게 원인을 찾아 내려갔습니다. 최면이 한층 깊어지자, 머릿속을 빼곡히 채우던 생각들이 한 발씩 뒤로 물러났습니다. 그러자 본인도 까맣게 잊고 있던 한 장면이 그 빈자리로 또렷이 떠올랐습니다. 말도 채 트이기 전의, 아주 어린 날이었습니다.
그 무렵 아이는 힘들거나 무서운 일이 있어도 마음 놓고 기댈 품이 곁에 없었습니다. 울어도 다가와 안아 주는 손이 없으니, 아이는 일찍부터 스스로 울음을 그치고 작은 몸을 웅크려 버티는 법을 익혔습니다. 누군가의 품에서 온몸의 힘을 풀고 늘어져 본 기억이, 그 아이에게는 없었습니다. 마음을 놓는 순간 더 무너질 것 같아, 늘 어딘가에 힘을 주고 있어야 했습니다.
곁에서 보기에는 그저 순하고 손 안 가는 아이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작은 몸이 배운 것은 따로 있었습니다. 힘을 빼고 나를 완전히 놓아 버리는 일은 위험하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잠이란 바로 그 일입니다. 하루의 끝에 몸과 마음의 힘을 모두 풀고, 나를 무방비로 내려놓아야 비로소 드는 것이 잠입니다.
평생 힘을 빼 본 적이 없는 사람에게, 잠자리는 가장 불편한 자리가 됩니다. 누워서 몸이 노곤하게 풀리려는 그 순간, 오래된 경계가 ‘안 돼, 놓으면 안 돼’ 하며 다시 몸을 일으켜 세웁니다. 약으로 그 경계를 눌러 재워도, 약을 줄이면 ‘나를 놓아선 안 된다’는 그 깊은 긴장이 어김없이 돌아왔던 것입니다.
여전히 깊은 최면 안에서, 그분이 한 일은 혼자 버티던 그 시절의 아이에게 다가가 가만히 말을 건네는 것이었습니다. 이제는 마음을 놓아도 된다고, 힘을 빼도 너를 받아 줄 사람이 여기 있다고 천천히 일러 주었습니다. 그 순간, 상담실에 앉아 있던 그분의 어깨가 눈에 띄게 툭 내려앉으며 길고 깊은 숨이 새어 나왔습니다. 평생 어딘가에 들어가 있던 힘이 처음으로 풀려나는 듯한 모습이었습니다.
한 달 뒤에 들은 변화 하나
한 달쯤 뒤에 다시 뵈었을 때, 그분이 들려준 변화는 의외로 소박했습니다. 얼마 전 가족과 짧은 여행을 다녀왔다고 합니다. 예전 같으면 모두가 잠든 것을 확인하고 짐까지 다 정리한 뒤에야 마지막으로 자리에 누웠을 분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날은 “나 먼저 좀 누울게” 하고는 일행보다 앞서 이불 속으로 들어갔다고 합니다. 그리고 누가 곁에서 부스럭대든 말든, 베개에 머리를 대고 얼마 지나지 않아 잠이 들었습니다. 아침에 깨고 나서야 ‘내가 어젯밤 제일 먼저 잠들었네’ 싶어 혼자 머쓱하게 웃었다고 하셨습니다.
치료마다 닿는 자리가 다릅니다
불면증 치료를 어디서부터 시작할지 막막한 것은, 길이 없어서가 아니라 길이 여럿이라 그렇습니다. 그리고 그 길들은 저마다 다른 자리를 다룹니다. 약은 곤두선 각성을 가라앉혀 오늘 밤을 넘기게 도와주는 자리에 있고, 검사는 다른 몸의 문제를 가려 주는 자리에 있습니다. 모두 저마다 필요한 역할입니다. 다만 ‘왜 침대에만 누우면 몸이 깨는가’, 그 까닭이 처음 새겨진 자리는 또 다른 곳에 있습니다. 그렇게 그 자리의 긴장을 풀어 가면, 여러 해 이어진 잠 문제도 한 달 남짓 사이에 눈에 띄게 가벼워지시는 분을 자주 뵙니다.
밤마다 약을 손에 들고 ‘이걸 평생 먹어야 하나’ 망설이고 계신다면, 혹은 어느 병원, 어떤 치료부터 시작해야 할지 몰라 검색만 거듭하고 계신다면, 한 가지는 분명합니다. 당신의 잠을 가로막고 있는 그 긴장에도, 처음 새겨진 자리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 자리를 찾는 일은 혼자서는 입구가 잘 보이지 않을 뿐, 길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