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불면이 시작된 게 벌써 몇 년째예요. 처음엔 며칠 못 자는 거겠지 했는데, 이젠 침대에 눕는 일 자체가 무서워요.
불을 끄고 누우면 몸은 천근같이 무거운데 머릿속만 환하게 켜지고, 심장이 괜히 두근거리기 시작해요.
그렇게 새벽 서너 시까지 뒤척이다 겨우 까무룩하면 또 출근 시간이고요.
안 해 본 게 없어요. 수면제도 먹어 봤고, 좋다는 차도 마셔 봤고, 자기 전에 휴대폰도 멀리 둬 봤어요.
그런데도 그대로예요. 이쯤 되니 저는 그냥 평생 이렇게 사는 사람인가 싶어요.”
오래 불면을 앓아 오신 한 분이 센터에서 들려주신 이야기입니다. 이런 분들이 가장 힘들어하시는 대목은 잠 못 드는 밤 그 자체가 아닙니다. 좋다는 것을 그렇게나 챙겨도 꿈쩍 않는다는 사실, 그래서 끝내 ‘내 의지가 약한가’ 하고 자신을 탓하게 되는 마음입니다.
약도 듣고 습관도 지켰는데, 밤은 그대로입니다
여기서 한 가지 의문이 듭니다. 수면제는 분명 잠드는 데 도움이 됩니다. 약은 곤두선 경계를 가라앉혀, 그 밤만큼은 잠으로 넘어가게 거들어 줍니다.
수면위생이라 부르는 습관들도 잠의 조건을 돕습니다. 일정한 취침 시각, 어두운 방, 멀리 둔 휴대폰 같은 것들 말입니다. 그런데 왜 몇 년을 그렇게 챙겨도 만성이 된 불면은 꿈쩍하지 않을까요.
답은 잠자리 자체가 변해 버렸다는 데 있습니다. 정확히는, 침대와 잠들기 전의 행동들이 ‘잠’이 아니라 ‘긴장’과 한 묶음으로 익혀진 것입니다. 본래 아무 상관없던 신호가 특정 반응과 이렇게 짝지어지는 것을, 심리학에서는 조건화라고 부릅니다.
풀밭을 떠올려 보면 쉽습니다. 처음에는 길이 없습니다. 그런데 매일 같은 자리를 밟고 지나면 풀이 눕고 흙이 드러나, 어느새 또렷한 길이 납니다.
길이 깊이 패고 나면, 나중에는 발이 알아서 그리로 듭니다. 잠 못 든 밤이 거듭될수록 ‘잠자리에 들면 긴장한다’는 길도 그렇게 깊이 패였습니다. 만성이란, 그 길이 여러 해에 걸쳐 단단히 다져졌다는 뜻입니다.
마음을 다잡을수록, 긴장은 더 또렷해집니다
그래서 만성 불면에서는 이를 닦거나 침실 문을 여는 것 같은 사소한 행동만으로도 몸이 먼저 긴장합니다. 아직 눕지도 않았는데, 잠자리로 향하는 신호만으로 경계가 켜지는 것입니다. 잠을 자러 가는 게 아니라, 잠과 씨름하러 들어가는 셈이 됩니다.
이 긴장은 마음먹는다고 꺼지지 않습니다. ‘오늘은 꼭 잘 자야지’라고 다짐할수록 오히려 더 또렷해지지요. 패인 길이 의식의 다짐을 따르는 게 아니라, 몸이 저 혼자 익혀 버린 반응이기 때문입니다. 약이 그 밤의 각성을 눌러 주어도, 길 자체는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 패인 길은 어디서부터 손대야 할까요. 최면상담이 다가가는 자리가 바로 거기, 그 긴장의 연합이 새겨진 무의식의 층입니다. 의식은 ‘왜 이렇게까지 됐는지’ 영문을 모르지만, 몸은 그 까닭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최면상담에서는 그 기억의 자리로 내려가, 길이 처음 어디서 나기 시작했는지를 더듬어 봅니다.
이 품 저 품 옮겨 다니며 늘 깨어 있던 아이
이분도 그렇게 내려가 보았습니다. 최면이 깊어지면서 의식의 분주함이 차츰 가라앉자, 누우면 올라오던 그 막연한 긴장이 어디서 왔는지 한 장면이 떠올랐습니다.
아주 어린 시절이었습니다. 그 무렵 그를 돌봐 주는 어른이 자주 바뀌었습니다. 오늘은 이 품, 다음 달은 저 품으로 옮겨 다니는 동안, 말도 채 트이지 않은 아이는 누구에게 마음을 붙여야 할지 알 수 없었습니다.
낯이 익을 만하면 또 다른 손에 맡겨지니, 아이가 할 수 있는 일은 늘 깨어 살피는 것뿐이었습니다. 이 사람은 곁에 계속 있어 줄 사람인가. 그렇게 한순간도 마음을 푹 놓아 본 적이 없었습니다.
마음을 놓는 법을 배우지 못한 아이에게, 긴장은 곧 살아남는 방식이었습니다. 늘 깨어 있던 그 경계가 자라는 내내 ‘쉬려고 누우면 도리어 또렷해지는’ 몸의 버릇으로 굳었고, 어른이 되어 잠자리에서 고스란히 되살아난 것입니다. 본인은 그 까닭을 기억조차 못 하니, ‘나는 왜 이럴까’라는 자책밖에 떠오르지 않았던 것이고요.
최면 속에서 어른이 된 그분은 늘 살피기만 하던 아이 곁에 가만히 머물렀습니다. 익숙해질 만하면 돌봐 주는 사람이 바뀌어 얼마나 불안했는지 먼저 알아주고, 눈앞의 자신이 바로 그 시간을 지나 자란 모습이라고 알려 주었습니다. 돌봐 주는 사람이 몇 번 바뀌었다고 해서 앞으로 만나는 사람도 모두 떠나는 것은 아니며, 이제는 관계를 확인하고 필요할 때 곁에 있어 달라고 말할 수 있다는 이야기도 전했습니다. 아이에게 마음을 놓는 순간 곧 또 다른 곳으로 보내지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잠시 눈을 감아도 곁을 지켜 줄 사람이 있을 수 있다는 사실을 새롭게 알게 됐습니다.
한 달쯤 뒤, 문을 여는 일이 달라졌습니다
여러 해 이어진 불면이라도 잠자리와 긴장의 연결이 느슨해지면 밤을 대하는 몸의 반응은 달라질 수 있습니다. 변화의 속도는 사람마다 다릅니다.
한 달쯤 뒤 그분은 여느 밤처럼 이를 닦고 침실 문을 열었다고 전했습니다. 예전 같으면 그 순간 벌써 가슴이 조였겠지만, 그날의 침실은 매일 밤 잠과 겨루던 시험장이 아니라 그저 잠을 자러 들어가는 방이었습니다. 그대로 누웠고, 몇 시에 잠들었는지도 모르게 아침을 맞았습니다.
몇 년을 끌어온 불면은 본인 눈에 도무지 끝이 없어 보입니다. 그러나 끝이 없는 게 아니라, 그 긴 세월 동안 깊이 패인 길을 의지만으로는 메울 수 없었을 뿐입니다. 길이 처음 어디서 났는지를 찾아 그 자리를 풀어 가면, 오래 다져진 길도 차츰 옅어집니다.
오늘 밤도 누우면 또 그럴 것이라 미리 단념하고 계신가요. 그 단념이야말로, 잠자리가 긴장과 얼마나 오래 묶여 있었는지를 말해 주는 신호입니다. 몇 년이 걸려 패인 길이라 해서, 그 길로만 영영 다녀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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