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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면클리닉이라도 가 봐야 하나 싶어요. 침대에 누우면 한두 시간은 그냥 천장만 봐요.
어쩌다 잠들어도 새벽 세 시쯤 눈이 번쩍 떠지고, 그다음부턴 또 말똥말똥이고요.
낮엔 머리에 안개가 낀 것처럼 멍하고요. 막상 검색해 보니 거기서 뭘 하는지도 모르겠고,
제 불면이 거기서 다룰 수 있는 건지도 모르겠더라고요.”
오래 잠을 설쳐 온 한 분이 상담실에서 꺼낸 말씀입니다. 잠이 안 오는 것도 힘든데, 어디로 가야 할지조차 막막하다는 것이 더 지치게 합니다. 병원에 가면 검사를 받을 테고, 수면클리닉에 가면 또 다른 점검을 받을 텐데, 그렇게 해도 정작 원인이 나올지 확신이 서지 않기 때문입니다.
검사지는 멀쩡한데 잠은 달아납니다
수면클리닉은 분명 도움이 되는 곳입니다. 코를 골다 숨이 멎지는 않는지, 다리가 들썩여 잠을 깨우지는 않는지, 잠의 단계가 제대로 흘러가는지를 기계로 살펴봅니다. 몸과 환경에서 잠을 방해하는 것이 있다면 그 자리에서 잡아낼 수 있습니다. 그러니 한 번쯤 받아 보는 검사는 마음이 놓이는 일이기도 합니다.
다만 그렇게 몸을 다 살펴도 ‘이상 없음’이라는 말을 듣고 돌아오는 분이 적지 않습니다. 검사지에는 문제가 없는데 밤마다 잠은 달아나니, 그제야 더 막막해지는 것입니다. 몸이 멀쩡하다는 건 다행이지만, 그렇다면 잠을 가로막는 것은 대체 어디에 있는 걸까요.
누우면 정신이 또렷해지는 건 게을러서가 아닙니다
여기에 검사로는 잘 잡히지 않는 자리가 하나 있습니다. 바로 ‘잠자리’ 자체가 언제부턴가 긴장과 짝지어져 버린 경우입니다. 심리학에서는 이를 조건화라고 부릅니다. 원래 아무 의미 없던 것이, 어떤 경험과 반복해서 겹치면 그 둘이 한 몸처럼 얽히는 학습을 말합니다.
잠 못 든 밤이 거듭되면, 침대와 불 끄는 순간이 ‘쉼’이 아니라 ‘경계’와 들러붙습니다. 그때부터 잠자리는 편히 눕는 자리가 아니라, 한쪽 귀를 열어 둔 채 보초를 서는 초소처럼 바뀝니다. 보초는 아무리 피곤해도 깊이 잠들 수 없습니다. 작은 기척 하나에도 깨도록 몸이 맞춰져 있기 때문입니다. 누우면 의지와 상관없이 정신이 또렷해지는 것은, 게을러서가 아니라 잠자리가 그렇게 학습된 탓입니다.
그래서 내 불면이 어느 쪽인지 가늠해 볼 단서가 하나 있습니다. 거실 소파나 여행지의 낯선 잠자리에서는 의외로 깜빡 잘 잤는데, 정작 익숙한 내 침대에만 누우면 말똥해진다면, 몸이나 환경보다 잠자리에 새겨진 긴장 쪽을 의심해 볼 만합니다. 반대로 어느 자리에 누워도 똑같이 힘들거나 코골이와 통증이 늘 따라온다면, 먼저 수면클리닉에서 몸을 살펴보는 편이 순서입니다. 어느 쪽이든 단정하긴 이르고, 내 잠이 어디서 막히는지 방향을 잡아 보는 정도입니다.
그렇다면 잠자리에 들러붙은 그 긴장은 어떻게 떼어 낼 수 있을까요. 수면제는 각성을 눌러 잠시 잠을 빌려주지만, 침대와 긴장이 짝지어진 그 연결 자체를 풀어 주지는 못합니다. 더 까다로운 점은, 그 연결이 우리가 의식으로 들여다보는 층보다 깊은 곳에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은 마음 편히 자자’고 아무리 다짐해도 그 다짐이 거기까지 닿지 않는 이유입니다. 최면상담이 다가서는 자리가 바로 그곳, 의식의 손이 닿지 않는 무의식의 층입니다.
최면 속에서 떠오른, 캄캄한 방의 아이
그분도 그 자리를 찾아 내려가 보기로 했습니다. 최면이 깊어지자 분주하던 머릿속이 차츰 가라앉고, 평소 떠올린 적 없던 한 장면이 또렷이 살아났습니다. 아주 어린 날, 말도 서툴렀을 무렵의 밤이었습니다.
캄캄한 방에 누운 아이는 잠들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현관 쪽에서 언제 발소리가 날지 몰라 작은 몸이 잔뜩 굳어 있었습니다. 늦은 밤 술에 취한 어른이 문을 거칠게 열고 들어오는 날이면, 집안 공기가 순식간에 달라졌기 때문입니다. 큰 소리가 날지 조용히 지나갈지 알 수 없으니, 아이는 이불 속에서 숨을 죽이고 한쪽 귀로만 바깥의 기척을 살폈습니다. 그렇게 밤마다 아이는 잠드는 법이 아니라, 잠든 척하며 경계하는 법을 먼저 익혔습니다.
그 아이에게 잠자리는 처음부터 쉬는 곳이 아니었습니다. 눈을 감되 정신은 깨어 있어야 안전한 자리, 곧 초소였던 셈입니다. 어른들에게는 한철 지나간 일이었을 그 밤들이, 말도 트이기 전 아이의 몸에는 ‘잠자리는 경계하는 곳’이라는 학습으로 새겨졌습니다. 수십 년이 지나 그 집을 떠나고도, 침대에 누우면 몸이 먼저 보초 자세로 돌아간 것입니다.
상담을 마치고 손위 형제에게 그 시절을 조심스레 물어보았더니, 어릴 적 아버지가 늦게 약주를 드시고 들어오는 밤이면 다들 숨을 죽이고 눈치를 봤다고 하더랍니다. 본인은 너무 어려 또렷이 기억하지 못하던 일이었습니다.
최면이 한 번 더 깊어진 자리에서, 지금의 그분이 그 밤의 아이 곁에 앉았습니다. 이제 그 문은 더 이상 무섭지 않아도 되고, 너는 무사히 자라 네 집 문을 네 손으로 잠그는 사람이 되었다고, 이불 속에서 귀를 세우지 않아도 된다고 가만히 일러 주었습니다. 한쪽 귀를 열고 살아온 오랜 보초 근무가 그제야 풀려나는 자리였습니다.
한 달 뒤, 그 밤은 예전과 달랐습니다
한 달쯤 지나 들려주신 이야기는 특별할 것 없는 어느 밤의 일이었습니다. 늦게 들어온 식구가 현관문을 여닫고 부엌에서 물을 마시는 소리가 들렸다고 합니다. 예전 같으면 그 작은 기척에 벌써 눈이 떠졌을 텐데, 그날은 한 번 돌아눕고는 그대로 다시 잠이 들었다고요. 다음 날 아침에야 누군가 늦게 들어온 걸 알았다고 합니다.
불면은 게으름이나 의지의 문제로 오해되기 쉽지만, 많은 경우 잠자리에 오래 밴 경계가 밤마다 저 혼자 켜지는 일입니다. 그 경계가 처음 자리 잡은 곳을 찾아 풀어 주면, 몸은 비로소 침대를 다시 ‘쉬는 곳’으로 받아들이기 시작합니다.
수면클리닉을 검색하다 이 글까지 닿으셨다면, 한번 떠올려 보셔도 좋겠습니다. 다른 데서는 곧잘 자던 내가 유독 내 침대에서만 밤새 깨어 있는 건 아닌지. 만약 그렇다면 그건 검사로 잡히는 자리가 아니라, 잠자리에 새겨진 오래된 경계가 보내는 신호일지 모릅니다. 그리고 그 신호가 시작된 자리로 내려가는 길은, 혼자서는 잘 보이지 않을 뿐 분명히 나 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