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분명히 밤에 7~8시간을 잤어요. 그런데 오후만 되면 눈꺼풀이 천근만근 내려앉고,
머릿속에 안개가 낀 것처럼 멍해지다가 의자에 앉은 채로 정신이 툭 꺼져요.
회의 중에 고개가 꺾여 깜짝 놀라 깬 적도 있어요.
운전하다 신호에 걸려 잠깐 졸고는 식은땀이 흐른 적도 있고요.
사람들은 게을러서 그렇다는데, 밤에 푹 자는데 낮이 왜 이렇게 무너질까요?”
삼십 대 직장인 한 분이 센터를 찾아와 꺼낸 이야기입니다. 잠을 줄인 것도 아니고, 밤에는 누구보다 깊이 잔다고 하셨습니다. 그런데도 낮이 되면 졸음이 밀려왔고, 긴장되고 중요한 자리일 수록 오히려 더 견디기 힘들었다고 합니다. 커피를 들이켜 봐도, 허벅지를 꼬집어 봐도 잠깐뿐이었습니다.
무엇보다 괴로운 건 졸음 자체가 아니라, 게으르고 의지 약한 사람으로 비치는 일이었다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의문이 듭니다. 밤에 충분히 잤다면 낮에는 말짱해야 할 텐데, 왜 자고도 졸린 걸까요.
낮졸림, 먼저 살펴야 할 곳은 몸과 신경입니다
이 물음에 답하기 전에 꼭 짚어 둘 것이 있습니다. 낮에 쏟아지는 졸음은 몸과 신경의 문제일 수 있습니다. 잠의 구조 자체가 흐트러지거나, 깨어 있음을 유지하는 뇌의 기능에 이상이 생기면 낮졸림이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졸음이 지나치게 심하거나, 웃거나 놀랄 때 갑자기 힘이 풀리는 듯한 다른 신호가 함께 있다면, 먼저 수면 전문 병원이나 신경과에서 진단을 받아 보시는 것이 순서입니다. 몸에 원인이 있다면 그 자리에서 치료를 받는 것이 가장 빠른 길입니다.
이 글에서 이야기하려는 것은 그다음입니다. 검사에서 몸에는 뚜렷한 원인이 보이지 않는데도 낮졸림이 이어지거나, 몸의 치료를 받으면서도 좀처럼 줄지 않는 경우가 있기 때문입니다.
졸음 뒤에는 마음의 안전장치가 있습니다
이런 졸음을 마음의 각도에서 보면 뜻밖의 모습이 드러납니다. 우리 몸에는 감당하기 힘든 상황을 만나면 스스로를 지키려는 안전장치가 있습니다. 맞설 수도 달아날 수도 없는 압박이 한계를 넘으면, 몸은 각성을 확 끌어내려 그 자리에서 가라앉아 버리기도 합니다. 무리하게 돌아가던 기계가 과부하에 이르면 과열을 막는 장치가 작동해 멈춰 서듯, 더 망가지지 않으려 스스로 기능을 내려놓는 셈입니다.
추정이지만, 낮에 쏟아지는 졸음의 일부는 이 가라앉는 반응이 엉뚱한 자리에서 켜진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멀쩡한 낮에 왜 이 장치가 작동하게 됐는지에는 ‘조건화’라는 마음의 학습이 얽혀 있습니다. 조건화란 특정한 상황과 특정한 몸의 반응이 짝을 이뤄 자동으로 이어지도록 새겨지는 것을 말합니다. 어느 시절 감당 못 할 긴장이 ‘도저히 못 버티겠다’는 느낌과 거듭 겹치면, 비슷한 압박이 올 때마다 몸이 알아서 가라앉도록 학습될 수 있습니다.
이 판단을 맡는 곳이 뇌 깊숙이 자리한 ‘편도체’입니다. 편도체가 ‘이건 못 버텨’라는 신호를 켜면, 의식과 상의하지도 않고 몸을 보호하려 각성을 떨어뜨립니다. 그러니 정신 차리자고 머리로 아무리 다그쳐도 그 말이 거기까지 닿지 않습니다. 커피로 졸음을 잠시 밀어내거나 잠을 더 늘려 봐도 그토록 예민하게 맞춰진 그 반응까지는 바꾸지 못하는 것도 이 때문입니다.
여기서 스스로 헤아려 볼 단서가 하나 있습니다. 몸에서 비롯된 졸음은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비교적 고르게 나타나는 편입니다. 반면 부담스럽고 긴장되는 자리에서 유독 심해지고, 마음이 편한 곳에서는 한결 덜하다면, 단순한 수면 부족보다 마음의 요인이 얹혀 있을 가능성을 떠올려 볼 수 있습니다. 다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가늠일 뿐, 정확한 구분은 앞서 말씀드린 병원 진단의 몫입니다.
최면상담은 졸음이 시작된 자리로 내려갑니다
그렇다면 그 예민하게 맞춰진 안전장치는 어디서 손볼 수 있을까요. 최면상담이 들여다보는 곳이 바로 거기입니다. 이 가라앉는 반응이 처음 학습된 무의식의 자리로 내려가, 그 장치가 왜 그토록 쉽게 작동하게 됐는지를 찾아가는 것입니다.
그분도 그렇게 원인을 찾아 내려갔습니다. 최면이 충분히 깊어지자, 오래 잊고 지내던 한 장면이 천천히 떠올랐습니다.
아주 어린 날이었습니다. 말도 채 여물지 않은 아이가 혼자 감당하기엔 너무 큰 일들을 자꾸 떠맡던 시절이었습니다. 키가 부뚜막에 닿을까 말까 한데, 어른들은 바쁘다며 어린아이에게 동생을 보라 하고, 무거운 것을 나르라 하고, 이건 네가 해 놓으라며 등을 떠밀었습니다. 아이는 어느 것 하나 제 힘으로 해낼 재간이 없었습니다.
해야 할 일은 자꾸 쌓이는데 어떻게 손대야 할지 몰라, 그저 발만 동동 굴렀습니다. 버겁다고 말할 데도, 잡아 줄 손도 없었고, 잘못하면 혼만 났습니다. 그렇게 감당이 한계를 넘던 순간, 어린 마음이 택한 길은 뜻밖이었습니다. 머릿속이 뿌예지면서, 그 버거운 자리에서 마음이 스르르 멀어져 버린 것입니다.
도망갈 수도 맞설 수도 없을 때, 아이가 자신을 지킨 유일한 방법은 그렇게 흐릿하게 가라앉는 것이었습니다. 그 시절 ‘감당 못 할 압박’과 ‘가라앉기’가 한 짝으로 마음 깊은 곳에 새겨졌습니다.
그 장면을 떠올리던 그분에게서도, 그때의 반응이 잠시 되살아나는 듯했습니다. 말소리가 차츰 느려지고 눈꺼풀이 무겁게 내려앉으며, 지금 이 자리에서도 그 가라앉음이 슬며시 고개를 드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 버거움을 충분히 다독이자, 그분은 다시 또렷하게 깨어났습니다.
이어서 그분은 그 시절 발을 동동 구르던 어린 자신에게 다가갔습니다. 이건 네가 혼자 떠안을 일이 아니었다고, 다 해내지 못해도 너를 탓할 사람은 없다고 천천히 일러 주었습니다. 너무 버거우면 잠시 내려놓아도 된다고, 그래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고요. 감당 못 하면 가라앉는 길 말고도 기댈 데가 있다는 것을, 아이는 그 자리에서 처음 배워 가는 듯했습니다.
한 달 뒤, 긴 회의를 끝까지 지켜냈습니다
그분은 그 시절의 일을 깊이 떠올려 본 적이 없었습니다. 낮의 졸음과 어린 날의 그 버거움이 이어져 있으리라고는 의식으로는 짐작조차 못 했습니다. 그러나 떠오르지 않을 뿐, 그 자국마저 사라진 것은 아닙니다.
한 달쯤 지나 들려주신 이야기는 대단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며칠 전, 좀처럼 끝나지 않는 긴 회의가 오후 내내 이어졌다고 합니다. 예전 같으면 한 시간도 못 가 눈앞이 뿌예지고 고개가 꺾였을 상황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날은 창으로 든 햇살이 책상 끝으로 옮겨 가는 동안, 오가는 말을 하나하나 따라가며 끝까지 자리를 지켰다고 합니다.
회의가 마무리될 때까지 머릿속은 한 번도 흐려지지 않았습니다. 참 오랜만의 일이었다고, 담담하게 전해 주셨습니다.
낮에 쏟아지는 졸음은 의지의 문제처럼 보이지만, 늘 게으름의 다른 이름인 것은 아닙니다. 몸에서 비롯된 졸음이라면 병원의 도움이 먼저이고, 마음에서 비롯된 졸음이라면 그 반응이 처음 뿌리내린 자리를 찾아 풀어 가는 길이 있습니다. 그곳에 다가가다 보면, 오래 끌어온 낮졸림도 차츰 가벼워지시는 분이 많습니다.
‘밤에 그렇게 자는데도 낮이 왜 이럴까.’ 여기까지 읽어 내려오신 마음에도 아마 그 물음이 맴돌고 있을 것입니다. 그 졸음은 당신이 게을러서가 아닙니다. 다만 그 까닭이 의지가 닿지 않는 깊은 곳에 있어, 아직 들여다보지 못했을 뿐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