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마흔일곱을 넘기면서 잠이 통째로 바뀌었어요.
자다가 온몸이 화끈 달아오르고 식은땀에 젖어 깨면, 어김없이 새벽 세 시예요.
그때부터는 눈만 말똥말똥, 아침까지 뒤척이고요.
낮엔 머리에 안개가 낀 듯하고, 별것 아닌 일에도 짜증이 확 솟구쳐요.
병원에선 갱년기라 그렇다는데, 그럼 갱년기만 지나면
다시 예전처럼 잘 자게 되는 걸까요?”
쉰을 앞둔 한 분이 센터에 오셔서 꺼내신 이야기입니다. 호르몬 검사에서 갱년기가 시작됐다는 말을 들었고, 처방받은 약도 챙겨 드시는 중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도 밤은 좀처럼 나아지지 않았습니다. 무엇보다 마음을 짓누른 건, 이 밤이 언제 끝날지 아무도 장담해 주지 않는다는 점이었습니다.
갱년기가 지나도 돌아오지 않는 잠이 있다
갱년기가 지나면 잠도 돌아올까. 이 물음의 답은 절반은 맞고, 절반은 비어 있습니다. 호르몬의 출렁임은 시간이 지나며 잦아듭니다. 그 무렵 갑자기 깨던 일도 함께 줄어드는 분이 분명 계십니다. 다만 그렇지 않은 분도 많습니다. 호르몬은 가라앉았는데 밤은 여전히 무너져 있는 경우입니다. 왜 어떤 잠은 처음 원인이 지나가도 돌아오지 않을까요.
처음 깨운 것과, 그다음에 남은 것
여기에는 갱년기 불면만의 이중 구조가 있습니다. 처음 잠을 깨운 건 분명 몸의 변화입니다. 열감과 식은땀이 한밤에 몸을 흔들어 깨웁니다. 그런데 그렇게 깨는 밤이 몇 달째 거듭되면, 몸은 한 가지를 새로 배웁니다. 잠자리가 곧 깨어 있는 자리라는 연결입니다.
심리학에서는 이렇게 두 가지가 거듭 짝을 이루어 자동으로 일어나는 학습을 조건형성, 곧 조건화라고 부릅니다. 한 번 익히고 나면 머리로 시키지 않아도 몸이 알아서 반응합니다. 발에 익은 길을 떠올리면 쉽습니다. 처음엔 볼일이 있어 매일 다니던 골목인데, 그 볼일이 사라진 뒤에도 발은 자기도 모르게 그 골목으로 접어듭니다. 갱년기의 몸은 깨는 길을 그렇게 발에 익혀 둔 셈입니다. 그래서 호르몬이라는 처음의 볼일이 끝나도, 발은 새벽 세 시면 그 길로 들어섭니다.
가늠해 볼 단서가 하나 있습니다. 갱년기 초기에는 열감이나 식은땀에 떠밀려 깨는 일이 잦습니다. 그런데 그런 신체 증상이 한결 가라앉은 뒤에도 매일 비슷한 시각에 또렷이 깨어 있다면, 몸이 그 시각을 깨는 자리로 익혀 둔 신호일 수 있습니다. 진단은 아니지만, 내 불면이 어느 쪽에 더 기울었는지 짐작해 보는 데 도움이 됩니다.
약이 닿지 못하는 자리가 남는다
그렇다면 약은 어떨까요. 호르몬 보충이나 수면제는 출렁이는 몸을 가라앉히고 깨는 강도와 횟수를 줄여 주어, 분명 힘이 됩니다. 다만 약이 닿는 곳은 몸의 신호이지, 발에 익은 그 길 자체는 아닙니다. 약을 줄이면 다시 그 길로 접어드는 분이 많은 까닭이 여기 있습니다.
그럼 그 길은 어떻게 풀어야 할까요. 한 가지 짚어 둘 것이 있습니다. 이 연결은 의식이 만든 것이 아니라 몸이 저 혼자 익힌 학습입니다. 이제 그만 깨도 된다고 머리로 타일러도, 그 말이 거기까지 내려가 닿지 않습니다. 최면상담이 들여다보는 자리가 바로 거기입니다. 의식의 손이 닿지 않던 무의식의 층으로 내려가, 그 긴장이 처음 새겨진 순간을 찾아가는 것입니다.
최면 속에서 다시 만난 낯선 방의 아이
그분도 그렇게 원인을 찾아 내려갔습니다. 최면이 깊어져 평소의 생각들이 한 겹 가라앉자, 본인도 까맣게 잊고 있던 한 장면이 떠올랐습니다. 아직 말도 서툴던 어린 시절, 큰 병을 앓아 한참을 병원에 누워 있던 때였습니다. 어느 순간 어른들의 손이 아이를 낯선 방으로 들여보냈고, 차가운 처치대 위에 아이는 혼자 남겨졌습니다. 곁에 있어 주던 온기가 문 밖으로 멀어지고, 쏟아지는 환한 불빛과 알 수 없는 기계음 속에서 아이는 작은 몸을 잔뜩 옹송그린 채 그저 견뎠습니다. 울어도 아무도 오지 않는 그 방에서, 아이는 한 가지를 배웠습니다. 여기서는 한순간도 몸의 힘을 풀어선 안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어른들에게는 아이를 살리기 위한 불가피한 치료였을 겁니다. 그러나 영문을 모르는 아이의 몸에는 다른 것이 새겨졌습니다. 낯선 어둠 속에 홀로 놓이면 끝까지 긴장을 놓아선 안 된다는 경계였습니다. 그 뒤로 아이는 마음 놓고 늘어지는 법을 좀처럼 익히지 못했습니다. 그 굳은 습관은 수십 년 동안 몸 깊은 곳에 잠들어 있었습니다.
그러다 갱년기에 들어 잠이 자꾸 끊기자, 한밤에 혼자 깨어 있는 그 상황이 옛 경계를 고스란히 다시 불러냈습니다. 어두운 새벽 홀로 깨어 몸이 굳는 그 감각은, 아주 오래전 그 방의 느낌과 꼭 닮아 있었습니다. 그 장면을 기억조차 못 하니, 그저 갱년기 탓이려니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기억나지 않는다는 것과 원인이 없다는 것은 다른 말입니다.
그 방에 홀로 남았던 아이에게, 지금의 그분이 가만히 손을 내밀었습니다. 옹송그린 작은 몸을 품에 안고 천천히 들려주었습니다. 이건 너를 살리려던 일이었고 이미 다 끝났다고, 너는 무사히 자랐으니 이제는 몸을 풀어도 된다고요.
얼마 뒤, 새벽의 거실 소파가 비어 있었다
몇 주쯤 지나 들려주신 이야기는 거창하지 않았습니다. 며칠 전 새벽, 여느 때처럼 화끈 달아오르며 눈이 떠졌다고 합니다. 예전 같으면 오늘도 글렀다며 거실 불을 켰을 텐데, 그날은 그냥 베개를 고쳐 베고 돌아누웠다고요. 그러고는 눈을 떠 보니 어느새 창이 환했습니다. 한참 뒤에야 내가 중간에 거실에 안 나갔구나 하고 알아차렸다고 하셨습니다. 새벽마다 혼자 앉아 있던 거실 소파에, 요즘은 며칠째 앉은 적이 없다는 것도요.
갱년기는 지나갑니다. 출렁이던 호르몬도 때가 되면 잦아듭니다. 다만 그 사이 몸이 익혀 둔 깨는 길은, 갱년기가 끝난다고 저절로 지워지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어떤 분은 갱년기가 한참 전에 지났는데도 여전히 새벽마다 깨어 있습니다. 기다려서 풀릴 자리와, 다가가야 풀릴 자리가 다르기 때문입니다.
지금도 갱년기만 끝나면 이 밤도 나아지겠지 하며 견디고 계신다면, 한 번쯤 나눠 생각해 보셔도 좋겠습니다. 시간이 데려갈 몫과, 몸 깊이 새겨진 그 경계처럼 다가가 풀어야 할 몫을요. 그 경계 쪽이라면, 그 자리에 닿는 길은 이미 나 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