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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명히 잠은 깼는데 눈만 떠질 뿐,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가 없는 거예요.
누가 가슴 위에 올라앉은 것처럼 묵직하고, 방 한쪽에 뭔가 서 있는 것 같은데
소리를 지르려 해도 입이 안 떨어져요. 길어야 몇십 초라는데
그 순간은 영원처럼 길고요. 한 번으로 끝나면 모르겠는데 자꾸 반복되니까,
이제는 잘 시간이 다가오기만 해도 가슴이 먼저 쿵쿵 뜁니다."
한 번이라도 겪어 본 사람은 압니다. 깨어 있는데 몸이 내 것이 아닌 그 몇 초가 얼마나 무서운지를. 그런데 주위에 털어놓으면 돌아오는 말은 대개 비슷합니다. 피곤해서 그렇다, 똑바로 누워 자서 그렇다, 다들 한 번씩 겪으니 별일 아니라고요. 정작 본인은 자다가 잘못되는 게 아닐까 싶을 만큼 무서웠는데, 그 두려움을 알아주는 사람이 없으니 더 외롭습니다.
잠든 사이 몸은 스스로 근육을 잠가 둡니다
먼저 한 가지는 짚어 두는 편이 좋겠습니다. 잠들거나 깰 무렵 몸이 잠깐 움직이지 않는 것 자체는, 사실 그리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우리 몸은 꿈을 꾸는 동안 함부로 움직이지 않도록 근육을 잠가 둡니다. 의식은 먼저 깼는데 그 잠금이 미처 풀리지 않은 짧은 순간, 그것이 바로 가위눌림입니다.
그러니 몸이 굳는 그 자체는 위험한 신호가 아니라, 잠과 깸이 잠깐 엇갈린 자연스러운 틈인 셈입니다. 그렇다면 의문이 하나 생깁니다.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는 그 짧은 틈이, 왜 유독 나에게는 매번 숨 막히는 공포로 찾아오는 걸까요. 그리고 왜 그 일은 한 번으로 끝나지 않고 갈수록 잦아지는 걸까요.
몸은 잠자리를 위험한 자리로 기억하기 시작합니다
열쇠는 '몸이 굳는다'는 사실이 아니라, 거기에 '공포'가 들러붙어 있다는 데 있습니다. 어떤 음식을 먹고 호되게 탈이 난 사람을 떠올려 보겠습니다. 한참이 지나도 그 음식 이름만 들으면 속이 울렁거립니다. 음식에 죄가 있는 것도 아니고 '그땐 상한 걸 먹어서 그랬지' 하고 아무리 따져 봐도, 속이 먼저 거부합니다. 한 번의 강렬한 경험이 그 대상과 한 묶음으로 새겨졌기 때문입니다.
가위눌림에서도 마음 안에서 비슷한 일이 벌어집니다. 처음 그 일을 겪었을 때의 공포가 '잠자리'와 한데 묶이면, 잠자리는 더 이상 쉬는 곳이 아니라 또 그 일이 벌어질지 모르는 위험 신호가 됩니다. 그래서 잠들려고 몸이 스르르 풀리는 순간, 위험을 살피는 뇌 깊은 곳의 편도체가 먼저 긴장합니다. 그 긴장이 몸을 굳게 했던 그때의 공포를 미리 불러옵니다. 그렇게 무서운 경험이 또 쌓이면서, 잠자리와 공포의 매듭은 갈수록 단단해집니다. 체한 음식 앞에서 속이 뒤집히듯, 한 번의 공포가 잠자리와 짝지어져 저절로 되살아나는 것을 조건화된 공포 반응이라고 합니다.
자세를 바꿔 자라거나 잠을 규칙적으로 푹 자라는 조언이 영 틀린 말은 아닙니다. 너무 피곤하거나 수면 리듬이 흐트러지면 가위눌림이 잦아지는 것은 사실이라, 생활을 고르게 다듬으면 빈도가 줄기도 합니다. 다만 그것만으로는 잠자리에 들러붙은 그 공포가 어디서 왔는지, 왜 내 몸이 잘 시간마다 먼저 굳는지까지 풀리지는 않습니다. 불을 환히 켜 두거나 누가 곁에 있어야만 겨우 잠드는 밤이 길어지는 이유입니다.
최면 속에서 다시 만난 어느 여름 한낮의 마당
그렇다면 잠자리와 공포가 묶여 버린 그 매듭은 어떻게 풀 수 있을까요. 머리로 '괜찮다'고 다짐하는 것으로는 닿지 않습니다. 그 매듭은 의식이 아니라 무의식의 자리에서, 의지와 상관없이 저 혼자 켜지고 꺼지기 때문입니다. 최면상담은 바로 그 자리로 내려가, 공포가 잠자리와 처음 묶이기 전의 출발점을 찾아갑니다.
센터를 찾은 한 분도 그랬습니다. 직장을 다니는 삼십 대 여성이었습니다. 몇 해 전부터 잠들 무렵 가위에 눌리는 일이 잦아져, 이제는 침실 불을 끄지 못한다고 하셨습니다. 최면이 깊어지자 늘 분주하던 머릿속이 차츰 잠잠해지고, 그 아래 묻혀 있던 한 장면이 천천히 떠올랐습니다. 잠자리와는 아무 상관도 없어 보이는, 어느 여름 한낮이었습니다.
말도 채 트이지 않았을 어린 날, 마당에서 혼자 놀고 있는데 갑자기 하늘이 시커멓게 내려앉았습니다. 그러더니 바로 머리 위에서 번개가 번쩍하고, 곧이어 천지가 쪼개지는 듯한 천둥소리가 내리꽂혔습니다. 아이는 울지도 도망치지도 못했습니다. 그저 그 자리에 못 박힌 듯 온몸이 굳어, 숨도 제대로 못 쉰 채 한참을 그렇게 서 있었습니다. 너무 무서우면 비명조차 안에서 얼어붙는다는 것을, 그 작은 몸이 처음 배운 순간이었습니다.
그 일은 아이의 마음에 '무서우면 몸이 굳고 소리도 못 낸다'는 것을 깊이 새겼습니다. 그리고 그 기억은 자라면서 까맣게 잊혔습니다. 그런데 잠이 들려고 몸이 노곤하게 풀리는 순간은, 공교롭게도 몸이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던 그때의 감각과 닮아 있었습니다. 무의식은 그 둘을 같은 일로 읽었습니다. 그래서 잠들 무렵 몸이 풀릴 때마다, 그 옛날의 공포가 함께 깨어났던 것입니다.
그 장면을 떠올리는 동안, 의자에 앉은 그분의 어깨가 안으로 잔뜩 말려 들고 턱에는 힘이 들어가 있었습니다. 어린 날 그 자리에서 굳었던 몸이, 수십 년이 지난 그 순간에도 똑같이 굳어 있었습니다. 잠잠해진 그 깊은 곳에서, 그분은 다 자란 지금의 눈으로 그 작은 아이를 다시 마주했습니다. 천둥은 무섭지만 너를 해치지 못했고 이미 다 지나간 일이라고 천천히 건넸습니다. 이제는 무서울 때 그렇게 굳어 있지 않아도 되고, 울어도 되고 달려도 된다고요.
그 말이 닿자 말려 있던 어깨가 스르르 펴졌습니다. 잠자리와 공포를 묶고 있던 매듭이, 처음 지어진 자리에서 풀려 나가고 있었습니다.
그 뒤로 밤은 조금씩 달라졌습니다
가위눌림이 반복되는 분들을 만나 보면, 그 뿌리가 잠과는 전혀 상관없어 보이는 먼 과거의 한순간에 닿아 있는 경우가 적지 않습니다. 본인은 그 장면을 까맣게 잊고 살아왔으니, 까닭 없이 몸만 이상해진 것처럼 느끼기 쉽습니다. 그러나 떠오르지 않을 뿐, 그 자리는 사라지지 않고 마음 깊은 곳에 남아 있습니다. 그곳을 찾아 공포의 매듭을 풀어 가면, 잠자리는 차츰 그저 쉬는 자리로 돌아오곤 합니다.
잠자리가 공포와 묶이면, 그 영향은 가위눌림에만 머무르지 않습니다. 같은 자리에서 사나운 악몽이 잦아지기도 합니다. 잠든 마음이 여전히 그 자리를 위험으로 여기니, 꿈마저 쫓기고 짓눌리는 모양으로 흘러가는 것입니다. 결이 다른 증상처럼 보여도, 풀어야 할 자리는 결국 하나입니다.
그 뒤로 어떻게 지내시는지는, 한참 지나 들려주신 짧은 이야기에 담겨 있었습니다. 어느 날 밤 늘 켜 두던 침실 불을 무심코 끄고 누웠다가, 그대로 잠이 들었다고 합니다. 아침에 눈을 떠 방이 깜깜한 걸 보고서야, 간밤에 불을 껐다는 걸 뒤늦게 알아차렸다고요. 무서워서가 아니라, 끄는 걸 의식할 필요조차 없어진 밤이었습니다.
혹 스스로 헤아려 보고 싶다면, 한 가지만 살펴보면 됩니다. 가위에 눌리는 그 순간보다, 그 일이 지나간 뒤에도 잘 시간이 다가오면 가슴이 미리 조여 오는지를요. 몸이 굳는 현상 자체보다 잠자리를 향한 두려움이 더 크다면, 공포가 이미 잠자리와 단단히 묶여 있다는 신호로 볼 수 있습니다. 물론 이것은 의학적 진단이 아니라, 내 어려움이 어디쯤 있는지 가늠해 보는 참고일 뿐입니다.
무서운 밤이 반복되면, 사람은 점점 잠 자체를 두려워하게 됩니다. 잠들기가 무서우니 더 늦게까지 깨어 있고, 그럴수록 몸은 지쳐 가위눌림은 더 자주 찾아옵니다. 이 고리를 의지로 끊어 내기란 쉽지 않습니다. 묶인 자리가 의식이 아니라 그 아래에 있기 때문입니다.
불을 켜 두지 않으면 잠들지 못하는 밤이 자꾸 길어진다면, 그것은 의지가 약해서가 아닙니다. 무서웠던 그 경험이 잠자리와 묶인 채 아직 풀리지 않고, 마음 깊은 곳에 그대로 남아 있다는 뜻입니다. 그 자리에 다가가 매듭을 풀어 가는 길은, 생각보다 가까이 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