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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드는 건 어렵지 않아요. 누우면 금방 잠이 와요.
그런데 새벽 세 시쯤 되면 누가 깨우기라도 한 것처럼 눈이 번쩍 떠져요.
화장실이 급한 것도 아니고, 무서운 꿈을 꾼 것도 아닌데요.
그때부터가 문제예요. 한번 깨면 머릿속이 환해지면서 다시 잠들 수가 없어요.
시계를 보면 어김없이 세 시 언저리고요.
그렇게 뒤척이다 보면 어느새 출근 시간이고,
낮 내내 모래주머니를 단 것처럼 몸이 무겁습니다.”
작은 가게를 꾸리는 쉰 줄의 한 분이 상담실에서 풀어놓으신 이야기입니다. 병원에서 수면다원검사까지 받았지만 잠드는 능력에는 이상이 없다는 말을 들었다고 합니다. 잠을 못 드는 게 아니라, 들었던 잠에서 자꾸 깨어 버리는 것이 이분의 고민이었습니다. 자다가 자꾸 깨는 이유가 어디에 있는지, 무엇이 풀려야 새벽의 깸이 잦아드는지 이 글에서 짚어 보려 합니다.
이런 분들은 종종 더 억울해하십니다. 밤새 한숨도 못 자는 사람에 비하면 배부른 소리 아니냐는 말까지 듣다 보면, 힘들다는 말조차 꺼내기 어려워집니다. 그러나 한밤에 깨어 다시 잠들지 못한 채 천장을 보는 시간이 매일 반복되면, 그 피로는 결코 가볍지 않습니다.
몸 안에 잘못 맞춰진 자명종이 하나 있습니다
여기서 한 가지가 눈에 띕니다. 깨는 시각이 늘 비슷하다는 점입니다. 잠의 기능이 그저 약해진 것이라면 깨는 시각도 들쭉날쭉해야 자연스럽습니다. 그런데 매번 같은 시각에 정확히 눈이 떠진다면, 거기엔 우연이 아니라 어떤 규칙이 숨어 있는 것입니다.
심리학에서는 이런 현상을 ‘조건화’라는 말로 설명합니다. 어려운 용어 같지만 뜻은 단순합니다. 두 가지 일이 자꾸 함께 일어나면 뇌가 그 둘을 한 묶음으로 외워 버린다는 것입니다. 어떤 일로 새벽 그 시각에 깨어 가슴이 두근거린 경험이 반복되면, 뇌는 ‘그 시각=깨어날 때’라고 학습합니다. 그다음부터는 자명종을 맞춰 두지 않아도, 그 시각이 되면 몸이 알아서 경계를 끌어올려 잠을 깨워 버립니다.
말하자면 몸 안에 잘못 맞춰진 자명종이 하나 들어앉은 셈입니다. 끄고 싶어도, 그 단추를 의식이 쥐고 있지 않습니다. 그래서 ‘제발 좀 자자’ 하고 아무리 다짐해도, 정작 새벽이 되면 자명종은 제 시각에 맞춰 울립니다.
혹시 내 이야기인가 싶으시다면 한 가지만 가늠해 보셔도 좋습니다. 잠드는 데는 별 어려움이 없는데 늘 비슷한 시각에 깨고, 그 시각만 지나면 다시 졸음이 몰려오는지요. 그렇다면 문제는 잠 자체보다 ‘그 시각에 맞춰진 각성’일 가능성이 큽니다.
약은 자명종 소리를 줄여 줄 뿐입니다
그렇다면 그 자명종을 약으로 멈출 수는 없을까요. 수면제나 안정제는 분명 도움이 됩니다. 울리는 소리를 작게 줄여, 깼다가도 한결 수월하게 다시 잠들도록 거들어 줍니다. 다만 약은 소리의 크기를 낮춰 줄 뿐, 자명종이 왜 하필 그 시각으로 맞춰졌는지 그 설정까지 바꾸지는 못합니다. 약을 끊으면 다시 울리는 일이 잦은 것도 그래서입니다.
한 가지 더 짚어 둘 것이 있습니다. 자명종이 그 시각으로 맞춰진 것은 의식이 한 일이 아닙니다. 의식보다 깊은 자리에서 저 혼자 학습되고 저 혼자 작동하는, 무의식의 일입니다. 머리로 ‘오늘은 안 깰 거야’라고 정해 봐야 그 말이 거기까지 닿지 않습니다. 의지가 약해서가 아니라, 의지가 미치지 못하는 층에 그 설정이 들어 있는 것입니다.
최면상담이 들여다보는 자리가 바로 거기입니다. 의식이 미처 기억하지 못하는 무의식의 층으로 내려가, 그 자명종이 맨 처음 그 시각으로 맞춰진 순간을 찾아가는 것입니다.
최면이 데려간 어린 시절의 그 새벽
이분도 그렇게 원인을 찾아 내려갔습니다. 최면이 충분히 깊어지면 평소 머릿속을 채우던 생각이 뒤로 물러나고, 의식이 닫아 두었던 기억의 문이 열립니다. 그 상태에서 새벽마다 눈이 떠질 때 차오르던 두근거림에 가만히 머물러 보았습니다. 그러자 본인조차 까맣게 잊고 지낸 어린 날의 한 장면이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아직 말도 서툴던 어린 시절, 깊은 밤이었습니다. 곤히 잠들어 있던 아이는 갑작스러운 고함과 다급한 발소리에 화들짝 깨어났습니다. 영문도 모른 채, 어른들이 분주히 오가는 한가운데서 아이는 그저 얼어붙어 있었습니다. 가슴이 쿵쿵 뛰고, 작은 몸이 바짝 곤두선 채로요.
어른들에게는 놀라 가슴을 쓸어내리고 지나간 하룻밤의 일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말로 정리할 줄 모르던 아이의 몸에는 다른 것이 새겨졌습니다. 한밤의 그 시각은 마음 놓고 잠겨 있어선 안 되는, 언제든 깨어 살펴야 하는 때라는 감각이었습니다. 그날 이후 아이의 몸은 그 시각만 되면 저도 모르게 경계를 끌어올렸습니다. 그렇게 수십 년에 걸쳐 ‘그 시각=깨어날 때’라는 자명종이 단단히 맞춰져 갔습니다.
흥미로운 것은, 최면 속에서 그 장면을 떠올리던 이분의 몸이었습니다. 편안히 기대어 있던 분인데도, 그 새벽 이야기에 닿는 순간 어깨가 솟구치듯 굳고 호흡이 가빠졌습니다. 수십 년 전 그 시각에 새겨진 경계가 지금 이 순간에도 여전히 살아 작동한다는 것을, 몸이 그대로 보여 준 셈입니다.
최면이 깊어진 자리에서, 지금의 이분은 그 밤에 얼어붙어 있던 아이에게 말을 건넸습니다. 이건 곧 지나갈 소동일 뿐이고 너는 여기서 안전하다고, 그러니 이 시각이 와도 굳이 깨어 살피지 않아도 된다고요. 오래도록 그 시각을 지키느라 한 번도 늦추어 본 적 없던 경계가, 그제야 조금씩 풀려 가는 자리였습니다.
한 달 뒤, 이분의 새벽은 조금 달라져 있었습니다
이처럼 자다가 자꾸 깨는 이유는 지금의 잠버릇이 아니라, 까마득한 과거의 한 새벽에 묶인 경우가 적지 않습니다. 본인은 그 장면을 기억조차 못 하니 까닭을 알 길이 없습니다. 그러나 기억나지 않는다는 것과 원인이 없다는 것은 전혀 다른 이야기입니다.
한 달쯤 지나 들려주신 근황은 소박했습니다. 며칠 전 새벽, 설핏 눈이 떠지긴 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예전처럼 머릿속이 환해지지도, 시계로 손이 가지도 않았다고요. 그저 돌아누워 이불을 끌어 덮었더니, 어느새 다시 잠 속으로 빠져들어 아침을 맞았다고 하셨습니다. 깬 시각이 몇 시였는지는 끝내 모른 채로요.
새벽마다 같은 시각에 눈이 떠지는 데에는 이유가 있습니다. 다만 그 이유가 의식이 닿는 곳보다 한참 깊은 자리에 있어, 본인 눈에는 보이지 않을 뿐입니다. 그러니 ‘왜 하필 늘 그 시각일까’ 하는 물음 앞에서 막막해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 물음은 틀리지 않았습니다. 몸속 자명종이 어쩌다 그 시각으로 맞춰졌는지 찾아 그 설정을 다시 손보면, 새벽마다 되풀이되던 깸도 한 달 안팎(개인차)을 두고 차츰 잦아드는 경우가 많습니다.
지금 이 글을 읽는 당신의 머릿속에도, 어쩌면 매일 같은 시각에 눈이 떠지던 그 새벽이 스쳤을지 모릅니다. 그 시각은 왜 하필 당신을 깨우는 걸까요. 답이 없는 것이 아니라, 답이 있는 곳을 아직 들여다보지 않았을 뿐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