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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말 내내 누워만 있었어요. 잠을 잔 것도 아니고 천장만 보다가 해가 지더라고요.
아내가 요즘 왜 이렇게 게을러졌냐고 하는데 할 말이 없었습니다.
아침에 눈은 떠지는데 몸이 침대에 붙어 안 떨어져요.
뒷목이랑 어깨는 하루 종일 돌덩이를 얹은 것 같고요.
회사에서도 메일 한 줄을 읽고 또 읽습니다.
제가 게을러진 게 맞나 싶다가도, 예전엔 이러지 않았거든요."
마흔 줄의 직장인 한 분이 상담실에 앉자마자 꺼낸 이야기입니다. 정작 견디기 힘든 것은 무거운 몸이 아니라고 하셨습니다. 식구들이 게으르다고 할 때 반박할 말이 없고, 그러다 어느새 자기 입으로도 '내가 나태해졌다'고 말하게 되는 것이 더 괴로웠다고 합니다.
우울증 초기 증상을 찾아보는 분들이 가장 많이 부딪히는 곤란이 여기에 있습니다. 열이 나거나 상처가 난 것이 아니어서 겉으로는 아무 표시가 나지 않습니다. 남에게 보이는 것이라고는 미뤄 둔 일과 늦어진 답장, 개지 않은 이불뿐입니다. 그러니 가까운 사람일 수록 왜 이렇게 처졌느냐고 묻게 되고, 듣는 쪽은 설명할 말을 찾지 못합니다.
게으름과 갈리는 지점은 딱 하나입니다
그래서 초기에는 한 가지만 짚어 보셔도 도움이 됩니다. 게으름은 대개 오래전부터 이어져 온 성향이고, 우울의 초기 신호는 어느 시점부터 시작된 변화입니다. 원래 느긋하던 사람이 여전히 느긋한 것과, 되던 일이 언젠가부터 안 되는 것은 다릅니다. 좋아하던 일 앞에서도 마음이 움직이지 않고 그 상태가 며칠이 아니라 몇 주째 이어진다면, 게으름이라는 이름표는 맞지 않습니다.
남과 견주지 마시고 예전의 나와 견주어 보시는 편이 훨씬 정확합니다. 다만 이것은 진단이 아니라 가늠일 뿐입니다. 마음에 걸리는 대목이 있다면 전문가와 함께 확인해 보시기를 권합니다.
몸이 멈추기 전에 결론이 먼저 나옵니다
그렇다면 왜 하필 지금, 되던 일이 안 되기 시작할까요. 이 시기에 마음속에서 가장 먼저 작동하는 것은 슬픔이 아니라 판정입니다. 무슨 일을 앞에 두든 '나는 그걸 해낼 만한 사람이 못 된다'는 결론이 먼저 나옵니다.
심리학에서는 이런 틀을 심리도식이라고 부릅니다. 어린 시절부터 자리 잡아, 나와 세상을 어떻게 볼지 미리 정해 둔 설정값 같은 것입니다. 그 설정이 '나는 부족하다' 쪽으로 맞춰져 있으면, 겪는 일마다 그 결론을 확인하는 방향으로 걸러집니다.
자동차의 연료 계기판을 떠올려 보시면 쉽습니다. 바늘이 고장 나 늘 바닥을 가리키는 차가 있다고 해 보겠습니다. 기름은 남아 있는데도 운전자는 먼 길을 나설 엄두를 내지 못합니다. 시동을 걸기 전에 이미 '이걸로는 못 간다'는 판단이 서기 때문입니다.
옆에서 보는 사람 눈에 들어오는 것은 멈춰 선 차 한 대뿐입니다.
그분도 비슷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주말에 밀린 집안일을 앞에 두면, 몸이 무거워지기 전에 '어차피 하다 말 텐데'라는 생각이 먼저 지나간다고요.
우울의 초기가 꼭 이렇습니다. 힘이 다 떨어져서가 아니라, 남은 힘을 재는 눈금이 어긋나 있어서 시작 전에 멈춥니다. 그렇게 하루를 보내고 나면 저녁에는 '역시 나는 안 되는 사람'이라는 결론이 한 번 더 확인됩니다. 이 고리가 몇 주 돌아가는 사이 몸은 점점 무거워지고, 주변의 오해는 그만큼 단단해집니다.
약도 마음먹기도 그 눈금까지는 닿지 못합니다
이쯤 되면 병원을 떠올리게 됩니다. 초기에 진료를 받아 보는 것은 도움이 되고, 필요할 때 처방되는 약은 가라앉은 기분과 흐트러진 잠을 붙들어 일상을 지탱해 줍니다. 다만 약은 기분을 붙들어 줄 뿐, 눈금이 어긋난 것까지 바로잡지는 못합니다. 마음을 다잡는 쪽도 마찬가지입니다. 바늘을 손가락으로 밀어 올려 봐야, 손을 떼면 그대로 바닥으로 돌아갑니다.
그러면 그 눈금은 언제 어긋난 걸까요. 심리도식이 만들어지는 시기는 대개 의식이 기억을 남기기 전입니다. 그래서 내가 언제부터 이랬더라 하고 아무리 되짚어도 답이 나오지 않습니다. 기억나지 않는 일을 결심으로 되돌릴 수는 없습니다.
최면상담은 기억이 시작되기 전의 시절까지 내려가, 눈금이 처음 어긋나던 순간을 찾습니다. 그리고 그때 아이가 혼자 내린 결론을 어른이 된 지금의 눈으로 다시 봅니다.
그 아침, 현관 앞에 앉아 있던 아이
그분은 최면 속에서 그때로 돌아가 봤습니다. 최면이 깊어지자 바깥 소리가 멀어졌습니다. 뭘 좀 해보려고 하면 가슴이 턱 막히던 그 느낌만 또렷했습니다. 그 느낌을 붙잡고 있다 보니 생각지도 못한 장면이 떠올랐습니다.
현관 앞이었습니다. 2살 남짓한 아이가 자기 신발을 혼자 신어 보겠다고 앉아 있습니다. 발뒤꿈치가 자꾸 접히고 찍찍이는 어긋나게 붙습니다.
시간에 쫓긴 어른이 다가와 "됐어, 이리 줘" 하고는 아이를 번쩍 들어 순식간에 신발을 신겨 버립니다. 문이 열리자 그 걸음이 앞서 나갑니다. 아이의 두 손은 갈 곳을 잃은 채 허공에 떠 있었습니다.
신발만이 아니었습니다. 숟가락도, 단추도, 엎지른 물을 닦는 걸레도 늘 어른 손이 먼저 갔습니다. 어른에게는 바쁜 아침마다 스쳐 간 사소한 일이었을 겁니다. 그러나 그 시절 아이가 받아 적은 문장은 달랐습니다.
'내 손으로 끝을 본 일이 하나도 없다, 그러니 나는 해내지 못하는 아이다.'
신발 한 짝이 무슨 대수냐 싶으실 수 있습니다. 그런데 아이가 자기를 알아 가는 방식이 그렇습니다. 스스로 해보고 끝을 보는 경험이 쌓여야 '나는 할 수 있는 사람'이라는 눈금이 잡힙니다. 그 경험이 번번이 중간에서 끊기면 눈금은 낮은 자리에 멈춘 채 굳습니다.
그 뒤로는 무슨 일을 맡아도 시작하기 전에 바늘부터 확인하게 됩니다. 이분은 게을러서 미룬 것이 아니라, 미루기 전에 이미 '나는 못 한다'는 생각이 앞섰던 것입니다.
깊은 최면중에 그분은 2살 무렵의 아이 곁에 앉았습니다. 어른이 신겨 준 신발을 아이 손으로 다시 벗기게 하고, 시간이 걸려도 좋으니 끝까지 해보라고 곁에서 기다렸습니다. 찍찍이가 삐뚤게 붙어도 괜찮다고, 네가 한 것이 맞다고 일러 주었습니다.
몇 주 뒤, 현관 구석의 상자가 열렸습니다
몇 주가 지난 뒤 어느 토요일 오후, 반년째 현관 구석에 세워 두었던 조립식 책장 상자를 그분이 뜯었다고 합니다. 설명서를 펴 놓고 나사를 하나씩 조였고, 판 하나가 뒤집혀 붙는 바람에 절반을 다시 풀었다가 맞췄습니다.
그분은 저녁 무렵 마지막 칸에 책을 꽂아 넣고는 그 앞에 한참을 서 있었다고 했습니다.
우울의 초기 신호는 이처럼 힘이 바닥나서가 아니라, 힘을 재는 눈금이 어긋난 곳에서 시작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게으름이라는 이름표는 겉으로 드러난 결과에만 붙은 것입니다. 안에서는 하고 싶은 마음이 매번 먼저 꺾이고 있었고, 그 사정은 본인조차 설명하지 못합니다. 눈금이 어긋난 순간이 기억보다 앞서 있기 때문입니다.
혹시 요즘 스스로에게 '내가 왜 이렇게 게을러졌지' 하고 묻고 계신다면, 물음의 방향을 한 번만 바꿔 보시면 좋겠습니다. 언제부터 그렇게 되었는지, 그전의 나는 어땠는지.
게을러진 것이 아니라 무엇인가가 먼저 꺾이고 있는 것이라면, 다잡을 일이 아니라 들여다볼 일입니다. 그 자리는 기억보다 아래에 있어 혼자서는 입구가 잘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못 찾을 자리는 아닙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