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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픈 것도 아니고 울고 싶은 것도 아니에요. 그냥 아무 느낌이 없어요.
재밌게 보던 프로가 켜져 있어도 화면만 쳐다보고, 좋아하던 커피도 그냥 뜨거운 물 같아요.
아침엔 눈이 떠져도 몸이 이불에서 안 떨어지고, 팔다리엔 젖은 모래가 들어찬 것 같고,
뒤통수는 종일 무겁고요. 슬프지도 않은데 이것도 우울증인가요?"
30대 초반의 회사원 한 분이 센터에 오셔서 꺼내 놓은 이야기입니다. 병원에서 우울증 진단을 받고 약을 드신 지 몇 달째라고 하셨습니다. 약을 먹으니 가라앉던 기분이 바닥까지 내려가지는 않는다고요. 그런데 거기서 더 올라오지도 않았습니다. 좋지도 나쁘지도 않은, 아무것도 아닌 상태에 그대로 머물러 있었습니다.
많은 분이 우울증 하면 눈물부터 떠올립니다. 하루 종일 울적하고 자꾸 눈물이 흐르는 모습이요. 그런데 상담실에서는 다른 이야기도 자주 듣습니다.
"아무 느낌이 없어요."
그분도 그랬습니다. 주말에 뭘 할지 정하지 못해 소파에 앉은 채로 반나절이 지나갔다고 합니다. 즐겨 듣던 음악을 틀어 놓아도 소리가 귀 옆으로 흘러갔고, 밥은 배가 고파서가 아니라 시간이 되어서 먹었다고요. 잠은 오래 자는데도 개운한 적이 없었습니다.
눈물이 없어도 다른 신호로 나타날 수 있습니다
따로 떼어 놓고 보면 제각각인 증상들입니다. 결정을 잘 못 하고, 집중이 흐트러지고, 입맛과 잠이 달라지고, 몸이 무겁습니다. 그런데 이 증상들을 함께 놓고 보면 한 가지 공통점이 보입니다. 무언가를 하고 싶은 마음과, 하고 나서 좋다고 느끼는 마음이 함께 약해져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울증 증상을 살펴볼 때는 슬픈지 아닌지만 볼 필요는 없습니다.
예전에 나를 즐겁게 하던 것이 지금도 즐거운가.
좋아하던 사람을 만나는 일, 좋아하던 음식을 먹는 일, 기다리던 주말이 지금도 기다려지는가.
여기에 선뜻 그렇다고 답하기 어렵다면, 슬픔이 없더라도 한번 눈여겨볼 만한 신호입니다.
물론 이것만으로 우울증을 진단할 수는 없습니다. 스스로 현재 상태를 살펴보는 하나의 기준으로 생각하시면 됩니다.
기대하고 즐기는 힘이 함께 줄어들 때
뇌에는 동기와 보상에 관여하는 여러 기능이 있습니다. 무언가를 하고 싶다는 마음이 생기고, 해보고 나서 좋았다고 느끼는 과정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우울증에서는 이런 기능이 함께 둔해질 수 있습니다.
옛날 우울에서 쓰던 무쇠 펌프를 떠올려 보면 조금 이해하기 쉽습니다.
손잡이를 눌러야 물이 올라오는데, 몇 번이고 눌러도 물이 나오지 않는다면 어느 순간부터는 손잡이에 손이 잘 가지 않습니다.
무감각도 이와 비슷한 면이 있습니다.
기쁨을 느끼는 능력이 완전히 사라졌다기보다, 무언가를 기대하고 움직이고 그 뒤에 만족을 느끼는 과정이 잘 작동하지 않는 상태에 가까울 수 있습니다.
여기에 '나는 해도 안 되는 사람이다', '기대해 봐야 소용없다'는 오래된 생각까지 겹치면 새로운 일을 시작하는 것은 더 어려워집니다.
그래서 "기운 좀 내", "좋은 생각을 해봐"라는 말만으로는 잘 움직이지 않습니다. 본인도 왜 이러는지 모르면서 몸과 마음이 먼저 멈춰 버리는 경우가 있기 때문입니다.
약물치료로 현재의 우울 증상을 조절하는 것과, 반복되는 감정과 반응이 자신의 삶에서 어떻게 만들어져 왔는지를 살펴보는 것은 서로 다른 작업입니다.
체인지 심리최면상담센터에서는 이 지점에서 현재의 무감각과 연결된 감정을 따라가 봅니다.
그분의 상담도 깊은 최면 상태에서 진행했습니다. 최면은 잠드는 것이 아닙니다. 바깥으로 흩어져 있던 주의가 한곳으로 모이면서 평소에는 잘 떠오르지 않던 기억이나 감정에 집중하기 쉬워지는 상태에 가깝습니다.
신발을 신은 채 기다리던 아이
아무 느낌 없이 멍하니 앉아 있을 때의 기분을 따라가던 중, 그분에게 아주 어린 시절의 한 장면이 떠올랐습니다.
현관 앞이었습니다.
오늘 어디에 데려가 준다는 말을 들은 아이가 아침부터 옷을 챙겨 입고 문간에 앉아 있었습니다. 신발까지 신은 채였습니다.
그런데 집 안은 계속 분주했고 문은 열리지 않았습니다. 얼마의 시간이 흘렀는지 모를때까지 아이는 그대로 기다렸습니다.
그런 날이 한 번이 아니었습니다.
"다음에는 꼭 가자."
그 말이 돌아왔고, 다음에도 비슷한 일이 반복됐습니다.
그러다 어느 날부터 아이는 그 말을 들어도 신발을 먼저 신지 않았습니다. 기다리지 않으면 기다리다 지칠 일도 없었으니까요.
어른들에게는 사정이 있어 미뤄진 나들이였을 것입니다. 하지만 어린아이에게 남는 느낌은 다를 수 있습니다.
기다려 봐야 오지 않는다.
그러니 처음부터 기대하지 않는 편이 덜 아프다.
이런 경험이 반복되면서 기대하지 않는 쪽이 점점 익숙해졌을 수도 있습니다.
사람은 그렇게 적응하고도 겉으로는 별문제 없이 살아갑니다. 학교에 다니고, 일을 하고, 사람을 만납니다. 다만 무언가 좋은 일이 생길 것 같아도 마음이 먼저 부풀어 오르지 않습니다. 기대하지 않으면 크게 실망할 일도 줄어듭니다. 대신 설레고 기뻐할 일도 함께 줄어들 수 있습니다.
그러다 일이 몰리고 몸과 마음이 지치는 시기가 오면, 그동안 버텨 오던 힘까지 떨어지면서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은 상태가 더 뚜렷해지기도 합니다.
시장 골목에서 있었던 일
최면중에 떠올린 어린시절 무기력감을 해결한 후, 이분은 다음 상담에 오셔서 근황을 들려주셨습니다.
지난 주말에 시장 골목을 지나는데 김이 오르는 만두 냄새에 발이 멈췄고
그 자리에서 한 봉지를 사 손에 들고 집으로 돌아왔다고 합니다. 집에 와서는 식구들 앞에 봉지를 풀어 놓고 함께 먹었다고요.
예전에는 시장 골목을 지나도 무슨 냄새가 나는지 모른 채 그냥 지나쳤다고 했는데, 만두 냄새가 나는게 그 분에게는 새롭게 다가왔던 모양입니다.
우울증 증상은 슬픔의 크기로만 가늠할 수 없습니다.
눈물이 나지 않더라도 하고 싶은 일이 떠오르지 않고, 예전에 좋았던 것이 더 이상 좋게 느껴지지 않는다면 마음의 상태를 한번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런 무감각은 최근의 스트레스나 소진과 함께 나타날 수도 있고, 어떤 사람에게는 오래된 경험과 감정 패턴이 함께 얽혀 있을 수도 있습니다.
요즘 무엇이 하고 싶으신지 한번 떠올려 보십시오. 한참을 생각했는데도 딱히 떠오르는 것이 없으셨다면, 지금 내 마음이 많이 지쳐 있는 것은 아닌지, 기대하거나 즐기는 힘이 언제부터 줄어들었는지를 한번 살펴볼 때일 수 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