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불면증 자체의 종류·원인·치료는 불면증 종합안내에서, 우울·무기력 전반은 우울증 종합안내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 글은 두 문제가 함께 있을 때 무엇을 먼저 확인할지에 집중합니다.
"요즘은 해가 지는 게 무서워요. 저녁만 되면 벌써 가슴이 내려앉고,
오늘도 못 자겠구나 하는 생각부터 들어요. 누우면 두세 시간은 그냥 천장만 보고 있고,
겨우 잠들어도 새벽에 깨서 그대로 아침이에요.
낮에는 가게에 나가 앉아 있어도 손님한테 웃어 줄 힘이 없고, 밥맛도 없어요.
병원에서는 우울증 쪽이 먼저라는데, 저는 잠만 자면 다 풀릴 것 같거든요.
우울증하고 불면증 중에 뭐부터 고쳐야 하는 건가요?"
오십을 앞두고 작은 가게를 꾸리는 한 남성이 첫 상담에서 이렇게 물었습니다. 우울증과 불면증을 함께 겪은 지 두 해 가까이 됐습니다. 어느 쪽부터 고칠지 고르기보다, 두 증상이 서로를 키우게 만드는 오래된 반응을 함께 살펴볼 필요가 있었습니다.
이런 분들이 억울해하는 대목이 있습니다. 시키는 대로 다 했다는 점입니다. 수면제도 먹고 우울증 약도 먹고, 낮에 걷고, 커피를 끊고, 일찍 눕습니다. 그런데 잠이 조금 나아진 며칠은 낮이 그대로 무겁고, 낮이 조금 살 만한 날에는 밤에 또 눈이 말짱합니다. 그러니 내가 뭘 잘못하고 있나, 결국 의지가 약한 건가 하는 생각으로 돌아옵니다.
무엇부터 치료할지보다 먼저 확인할 세 가지
1. 자해·죽음에 관한 생각이나 일상 유지가 어려울 정도의 심한 우울이 있다면 정신건강의학과 평가와 안전 확보를 먼저 살펴봅니다.
2. 수면 중 호흡정지, 위험한 이상행동, 심한 주간졸림이 있다면 수면전문 진료와 의학적 평가가 우선일 수 있습니다.
3. 이런 위험 신호가 없다면 둘 중 하나를 억지로 고르기보다, 시작 시점과 약물·수면 상태, 낮과 밤의 악순환을 함께 정리해 진료와 상담 계획을 세웁니다.
공식 참고자료: 미국 국립정신건강연구소(NIMH)의 우울증 안내 · 미국수면의학회의 성인 만성불면증 행동·심리치료 지침
밤이 길어진 다음 날, 다시 찾아오는 저녁
왜 한쪽을 붙들면 다른 쪽이 빠져나갈까요. 우울증과 불면증은 따로 생긴 두 병이 앞뒤로 줄을 선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서로를 부추기는 한 쌍으로 움직이기 때문입니다. 밤에 못 자면 다음 날 몸이 처지고, 무엇을 해도 소용없다는 생각이 짙어집니다. 그 생각을 안고 저녁을 맞으면 눕기도 전에 몸이 먼저 긴장하고, 그 밤은 또 길어집니다.
심리학에서는 이렇게 어떤 상황과 몸의 반응이 짝으로 굳는 것을 조건화라고 부릅니다. 잠자리가 쉬는 곳이 아니라 걱정하고 뒤척이는 곳으로 몸에 익어 버려서, 눕기만 하면 저절로 정신이 깨는 상태입니다. 여기에 우울의 무력감이 얹힙니다. 못 잔 밤이 쌓일수록 나는 내 몸 하나 재우지 못하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굳고, 그 생각이 다시 잠자리를 더 긴장되는 곳으로 만듭니다.
그분의 말을 빌리면 이렇습니다. "약 먹고 일곱 시간 잔 다음 날도 가게에 앉아 있으면 그냥 다 귀찮아요. 그러다 저녁이 오면 어제 잔 건 잊어버리고 또 오늘 밤 걱정이에요." 잠이 돌아온 밤이 낮을 살리지 못하고, 그 낮이 다시 못 자는 밤으로 이어지는 셈입니다.
두 바퀴를 돌리는 태엽
태엽을 감아 돌리는 장난감을 떠올려 보시면 됩니다. 안에는 톱니바퀴 두 개가 맞물려 있어서 하나가 돌면 다른 하나도 반드시 돕니다. 밤에 깨어 있는 것이 한 바퀴, 낮에 처지는 것이 다른 바퀴라고 해 보겠습니다. 밤의 바퀴가 돌면 낮의 바퀴가 돌고, 낮의 바퀴가 돌면 다시 밤의 바퀴를 돌립니다. 그런데 두 바퀴를 움직이는 힘은 어느 바퀴에도 있지 않고, 감겨 있는 태엽에서 나옵니다.
그분은 병원에서 수면제와 우울증 약을 함께 처방받아 드시고 있었습니다. 약은 제 몫을 합니다. 수면제는 밤의 각성을 낮춰 몸이 쉴 시간을 벌어 주고, 우울증 약은 가라앉은 기분을 끌어올려 하루를 이어 가는 데 도움을 줍니다. 그 덕에 버티는 분이 많고, 약을 줄이거나 바꾸는 일은 반드시 의사와 상의하셔야 합니다. 다만 두 증상을 함께 돌게 하는 태엽, 곧 오래된 반응이 그대로 남아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럼 그 태엽은 언제 감겼을까요. 잠자리에 들기만 하면 몸이 긴장하고, 애써도 소용없다는 생각이 굳어진 건 어제오늘 일이 아닌 경우가 많습니다. 오늘은 걱정하지 말자고 아무리 마음먹어도 이불을 덮는 순간 몸이 먼저 깨는 것은, 그 반응이 말을 배우기도 전부터 몸에 익어 생각을 거치기 전에 먼저 나타나기 때문일 수 있습니다. 그런데 본인은 그런 일이 있었는지조차 모릅니다. 최면상담에서는 바로 이 부분을 다루는데, 지금의 밤과 낮으로 이어지는 오래된 감정과 자동반응이 처음 몸에 익은 때를 찾아가 그때 감긴 태엽을 푸는 것입니다.
두 증상을 함께 움직이는 반응은 어떻게 찾을까
현재의 불면과 무기력을 함께 움직이게 하는 오래된 감정과 무의식 자동반응을 어떻게 찾아가고, 어린 시절의 경험과 연결된 원인을 어떻게 다시 다루는지 최면 원인치료의 전체 원리와 과정을 아래 글에서 자세히 설명합니다.
→ 최면 원인치료란 무엇일까? 무의식 원인을 찾아 해결하는 원리와 과정
그분에게 태엽이 감긴 때가 보인 것은 상담실에서 최면이 충분히 깊어진 뒤였습니다. 최면은 잠드는 것이 아니라, 눈을 감고 한 가지에 깊이 집중하면서 평소에는 떠오르지 않던 기억이 올라올 수 있는 상태입니다. 저녁마다 미리 내려앉던 그 느낌에 머물자, 떠오른 장면은 밤이 아니라 대낮의 집 안이었습니다.
대낮의 조용한 집, 귤을 든 아이
말이 아직 서툴던 아주 어린 때였습니다. 집 안이 며칠째 조용했습니다. 한 어른은 식탁에 앉아 있고 다른 어른은 거실 소파에 앉아 있는데, 두 사람은 서로 말을 하지 않았습니다. 텔레비전만 혼자 소리를 냈습니다. 아이는 식탁 위 귤을 하나 집어 거실로 가져가 소파에 앉은 어른의 무릎에 올려놓고, 다시 식탁으로 돌아와 다른 어른의 손을 잡아끌었습니다.
어른들은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지만 서로에게는 눈을 주지 않았습니다. 아이는 노래도 불러 보고, 컵을 들고 두 사람 사이를 몇 번이나 오갔습니다. 그래도 집은 그대로 조용했습니다.
그날 밤 이불 속에 누워서도 아이는 거실 쪽에 귀를 기울인 채, 오늘은 두 사람이 말을 하려나 기다렸습니다. 몸은 축 처지는데 눈은 감기지 않았습니다. 그런 밤이 이어졌습니다.
두 어른이 언제 다시 말을 주고받았는지는 그 장면만으로 알 수 없었습니다. 아이에게는 낮에는 자신이 아무리 오가도 두 어른이 달라지지 않는다는 무력감이, 밤에는 누워서도 거실에서 무슨 소리가 나는지 살펴야 한다는 긴장이 함께 남았습니다. 아이는 어른들의 관계를 바꾸는 일과 그 변화를 확인하는 일을 자기 몫처럼 떠안았습니다. 낮의 애씀과 밤의 경계가 한 장면에서 함께 시작된 셈이며, 본인은 그런 시기가 있었는지조차 몰랐다고 합니다.
깊은 최면 중에 오십을 앞둔 지금의 그분이 아이 곁에 앉았습니다. 두 어른이 말하지 않는 동안 집을 바꾸어 보려고 얼마나 애썼고, 밤에도 소리를 놓치지 않으려 얼마나 긴장했는지 먼저 알아주었습니다. 어른들의 관계는 어른들이 풀어야 할 일이며, 아이가 귤을 나르고 잠을 미룬다고 그 결과를 책임질 수 있는 것은 아니라고 알려 주었습니다. 실제로 도움이 필요한 소리가 들리면 그때 어른에게 알리거나 도움을 청하면 되고, 아무 일도 확인되지 않은 동안에는 놀고 먹고 잠들어도 된다고 전했습니다. 아이는 쉬는 것이 어른들을 외면하는 일이 아니며, 자신이 지켜보지 않아도 어른들의 몫은 어른들에게 남는다는 사실을 새롭게 알게 됐습니다. 최면에서는 낮에 해결되지 않은 일을 밤까지 지켜보며 잠과 일상을 미뤘던 다른 관련 경험들도 함께 다뤘습니다. 자신의 책임과 어른들의 몫을 나누고, 확인할 일이 없을 때는 경계를 끝내는 이해를 넓혀 갔습니다.
새벽의 거실과 일요일 아침
상담 뒤 달라진 모습을 먼저 알아본 사람은 아내였습니다. 새벽마다 켜지던 거실 불과 낮게 들리던 텔레비전 소리가 며칠째 사라졌습니다. 그다음 주 일요일 아침에는 그분이 먼저 일어나 아내에게 나가서 밥을 먹자고 했고, 아내는 그 말을 몇 해 만에 들었다고 전했습니다.
우울증과 불면증이 함께 온 분이라면 오늘 저녁 한 가지만 살펴보시면 됩니다. 해가 기울 무렵, 아직 눕지도 않았는데 마음이 먼저 내려앉고 ‘오늘도 못 자겠지’ 하는 생각이 따라오는지 보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잠 문제와 기분 문제가 이미 한 덩어리로 움직이고 있다는 신호로 볼 수 있습니다. 진단이 아니라 상태를 가늠해 보는 정도이니, 마음에 걸리면 진료도 함께 받아 보시기를 권합니다.
지금 이 글을 읽는 분의 저녁도 그렇게 먼저 내려앉는다면, 그 마음은 오늘 갑자기 생긴 것이 아닙니다. 오래전에 밤과 낮이 한 짝으로 몸에 익은 반응이 되풀이되는 것입니다. 무엇부터 풀어야 할지 고민하느라 밤을 또 보내지 않으셔도 됩니다. 풀어야 할 태엽은 하나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