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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들 운동을 하라고 합니다. 저도 그 말이 맞는 줄은 압니다.
그런데 아침에 눈을 뜨면 팔부터 안 올라가요.
어제는 운동복까지 꺼내 놓고 침대에 걸터앉은 채로 한 시간이 갔습니다.
그러고 나면 이런 것도 못 하는구나 싶어서 더 가라앉아요."
삼십 대 후반의 직장인 한 분이 상담을 시작하며 들려주신 말입니다. 우울증 진단을 받고 약을 드시는 중이었고, 우울증 극복 방법에 관한 글은 읽을 만큼 읽어 보셨다고 합니다. 이 글에서 먼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이것입니다. 조언이 버거운 이유는 의지가 모자라서가 아니라, 시작하기 전에 먼저 나오는 대답이 따로 있기 때문입니다.
권하는 사람들은 대개 선의입니다. 몸을 움직이면 기분이 나아진다는 말도 틀린 말이 아닙니다. 문제는 그 말이 지금 몸을 일으킬 수 있는 사람을 전제로 한다는 데 있습니다. 몸을 일으키는 것부터 막히는 사람에게는 좋은 조언도 해야 할 일이 하나 더 늘어난 것으로 들릴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울증 극복 방법을 검색할수록 목록만 길어집니다. 아침 햇빛 쬐기, 규칙적인 식사, 삼십 분 걷기. 읽는 동안에는 잠깐 마음이 놓이는데, 정작 아무것도 하지 못한 저녁이면 그 목록이 그대로 증거가 됩니다. 나는 이것도 안 하는 사람이라는 증거 말입니다.
운동복 앞에서 먼저 나온 한마디
그렇다면 몸을 일으키는 일이 왜 그렇게까지 어려운 걸까요. 우울할 때 가장 먼저 힘을 잃는 것은 근육이 아니라 시작하는 힘입니다. 그리고 그 시작을 막아서는 것은 마음속에서 먼저 나오는 한마디입니다. ‘해 봐야 또 흐지부지되겠지.’
심리학에서는 이렇게 미리 답을 정해 두는 마음의 틀을 심리도식이라고 부릅니다. 그중에서도 ‘해도 안 된다’는 쪽으로 굳어진 심리도식을 ‘실패 도식’이라고 합니다. 어린 시절에 만들어져 어른이 된 뒤에도 무슨 일을 앞두면 먼저 답을 내놓습니다.
몇 번이나 헛걸음한 가게를 떠올려 보시면 됩니다. 갈 때마다 문이 닫혀 있으면 어느 순간부터는 그 앞을 지나면서도 안을 들여다보지 않게 됩니다. 오늘은 열려 있을지도 모르는데 확인하는 일 자체를 그만두는 것입니다. 실패 도식이 하는 일이 이와 같습니다. 해 보기도 전에 이미 닫혀 있다고 답해 버립니다.
여기에 하나가 더 겹칩니다. 우울할 때는 무언가를 해냈을 때 느끼던 뿌듯함도 함께 둔해집니다. 그러니 어쩌다 힘을 내어 삼십 분을 걷고 와도, 예전 같으면 뒤따라오던 개운함이 잘 오지 않습니다. 다음에 또 나갈 힘은 그 개운함에서 나오는데, 그 개운함이 오지 않으니 사흘을 넘기기가 어렵습니다.
그래서 스스로 가늠해 볼 것이 하나 있습니다. 누가 무엇을 권했을 때 내 안에서 가장 먼저 나오는 대답을 들어 보시는 것입니다. ‘오늘은 좀 힘든데’라면 몸이 먼저 답한 것이고, ‘해 봤자 또 안 되겠지’라면 결론이 몸보다 먼저 나온 것입니다. 두 번째 대답이 매번 앞질러 나온다면, 게으름이 아니라 오래된 반응을 살펴보실 때입니다.
물론 이것은 진단이 아니라 스스로를 가늠해 보는 참고일 뿐입니다. 마음에 걸리는 대목이 있으면 전문가와 함께 짚어 보시기 바랍니다.
그 대답이 시작된 곳을 따라가다
약은 이 시기에 분명한 몫이 있습니다. 가라앉은 기분을 끌어올려 하루를 버틸 힘을 만들어 주고, 그 힘이 있어야 다른 시도도 해 볼 수 있습니다. 생각을 다루는 상담 역시 해 봐야 안 된다는 판단을 하나씩 되짚어 보게 해 줍니다. 다만 그 판단이 처음 어떻게 몸에 배었는지는 본인도 떠올리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떠올리지 못하는 데는 이유가 있습니다. 이 대답은 살면서 따져 보고 내린 결론이 아니라, 아주 어릴 때 겪은 일이 자동반응이라는 습관으로 남은 것입니다. 그래서 마음을 굳게 먹어도 며칠이면 제자리로 돌아옵니다. 최면상담은 여기서 방향을 달리합니다. 지금 무언가를 시작하려 할 때 올라오는 감정을 실마리로 삼아, 그 자동반응이 처음 만들어진 시기까지 거슬러 살펴봅니다.
방바닥에 흩어진 나무토막
그분의 상담도 여기서 출발했습니다. 최면이 깊어진 상태에서 운동복을 앞에 두고 올라오던 막막함에 그대로 머물러 보았습니다. 그러자 어린 날의 한 장면이 떠올랐습니다. 본인도 이런 게 왜 나오느냐고 했다고 합니다.
아직 말이 서툰 아이가 방바닥에 앉아 나무토막을 쌓고 있습니다. 하나, 둘, 셋을 올리고 넷째를 얹으면 기우뚱하다가 무너집니다. 아이는 다시 모아 쌓습니다. 또 무너집니다.
그러다 한 번은 제법 높이 올라갔습니다. 아이가 뒤를 돌아보며 어른을 부릅니다. 부르는 사이에 토막이 무너져 방바닥에 흩어집니다. 어른이 돌아봤을 때 남아 있는 것은 흩어진 토막뿐이었고, ‘또 무너뜨렸구나’ 하는 말이 웃음에 섞여 들렸습니다.
그 방이 어느 집이었는지, 아이가 부른 사람이 누구였는지는 장면에 나오지 않았습니다. 그분이 끝내 또렷하게 기억한 것은 하나뿐이었습니다. 다 쌓은 것을 본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는 것입니다.
지나고 보면 놀이 한 번 어그러진 일입니다. 그런데 그 나이의 아이에게 그 일은 단순한 놀이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내가 시작한 것은 끝까지 가지 않는다는 것, 어쩌다 끝까지 가더라도 아무도 보지 못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이 대답이 몸에 배고 나면 그다음부터는 순서가 바뀝니다. 쌓기 전에 무너진 모습이 먼저 떠오릅니다.
어른이 되어서도 그 순서는 그대로였습니다. 배우고 싶은 것이 생기면 등록하기 전에 그만두는 장면이 먼저 그려졌고, 실제로 몇 번은 그렇게 끝났습니다. 그러니 운동을 하라는 말을 들을 때마다, 몸이 움직이기 전에 흐지부지 끝났던 일들이 먼저 떠올랐던 것입니다.
깊은 최면 속에서 그분은 방바닥에 앉은 아이 곁에 다가갔습니다. 흩어진 토막을 모아 아이 손에 하나씩 쥐여 주었습니다. 마지막 토막이 올라갔을 때, 아이가 부르기도 전에 먼저 다 됐다고 말해 주었습니다.
아이는 그 말을 듣고 한참 동안 쌓아 올린 토막을 그대로 두고 바라보았다고 합니다.
우울할 때 조언이 버겁게 들리는 것은 마음이 삐뚤어져서가 아닙니다. 권하는 말은 앞으로 해야 할 일을 가리키지만, 마음에는 끝을 보지 못했던 일들이 먼저 떠오르기 때문입니다.
냉장고 문에 붙어 있던 병원 번호
그분은 반년 넘게 미뤄 둔 치과 예약을 전화로 잡고 그 주에 다녀오셨습니다. 이가 시리기 시작한 지는 그보다 오래되었고, 병원 번호는 냉장고 문에 붙어 있었습니다. 다녀온 김에 다음 진료 날짜까지 받아 왔다고 합니다.
오늘도 누군가 좋은 방법을 하나 더 알려 주었을지 모릅니다. 그 말을 듣고 가장 먼저 올라온 것이 ‘해 봐야 뭐 하나’ 하는 생각이었다면, 그것은 게으름이 아닙니다. 무엇을 하기도 전에 결론부터 내놓도록 오래전에 익혀진 자동반응입니다.
쌓다가 자꾸 무너지는 토막을 바라보던 아이에게 필요했던 것은 더 쌓으라는 말이 아니었습니다. 다 쌓는 것을 끝까지 봐 줄 사람 하나였습니다. 운동복을 앞에 두고 앉아 계신 분에게 필요한 것도 방법을 하나 더 듣는 일이 아닐수도 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