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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딱히 이유가 없어요. 회사에서 크게 힘든 일이 있는 것도 아니고,
집에 무슨 일이 생긴 것도 아니에요. 그런데 아침에 눈을 뜨면 이미 가라앉아 있어요.
턱이 얼얼한 걸 보면 밤새 이를 악물고 잔 모양이고, 세수하러 가는 몇 걸음이 한참 걸려요.
점심때 다들 웃고 떠드는데 저 혼자 유리 한 장 너머에서 듣고 있는 것 같고요.
다들 우울증 원인이 뭐냐고 묻는데, 저도 그게 제일 궁금해요.
아무 일도 없는데 사람이 왜 이러죠?"
사십 대 초반의 직장인 한 분이 상담실에서 들려주신 이야기입니다. 병원에서 우울증 진단을 받고 약을 드시는 중이었고, 검사에서 다른 이상은 나오지 않았다고 하셨습니다. 이 글에서는 이유를 짚기 어려운 우울도 어디에 뿌리를 두고 있는지, 그리고 그 뿌리가 왜 스스로는 보이지 않는지를 말씀드리려 합니다.
이런 분들이 가장 힘들어하는 것은 가라앉은 기분 자체가 아닙니다. 이유를 못 찾겠다는 점입니다. 남들은 사연이 있어서 힘들다는데 나는 딱히 내세울 사연조차 없으니, 나중에는 스스로를 의심하게 됩니다. 배가 불러서 그런가, 마음이 약해서 그런가, 원래 이런 사람인가 하는 생각이 차례로 따라붙습니다.
그래서 검색창에 우울증 원인을 쳐 봅니다. 스트레스가 쌓여서라는 설명도 있고, 뇌 안의 신경전달물질이 줄어서라는 말도 있고, 타고난 성격 탓이라는 이야기도 나옵니다. 다 틀린 말은 아닙니다. 다만 읽고 나면 의문이 하나 더 생깁니다. 나보다 훨씬 고단한 사람도 멀쩡히 지내는데, 왜 하필 나는 이럴까.
하루가 끝나면 무엇이 남는가
여기서 짚어 볼 것이 있습니다. 우울한 사람에게 좋은 일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라는 점입니다. 그날도 누군가는 고맙다고 했고, 맡은 일은 무사히 끝났고, 저녁에 먹은 음식은 맛있었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잠자리에 들 때쯤이면 그중 무엇도 남아 있지 않습니다. 남는 것은 오후에 흘려들은 한마디와 서류에서 뒤늦게 발견한 오타뿐입니다. 그러고는 그 한마디를 잠들 때까지 몇 번이고 다시 떠올립니다.
심리학에서는 사람마다 자신과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을 미리 정해 놓은 마음의 틀이 있다고 봅니다. 이 틀을 심리도식이라고 부릅니다. 어릴 때 만들어져 어른이 된 뒤에도 기본 설정처럼 작동합니다. 그중에서도 ‘나는 어딘가 모자란 사람’이라고 미리 정해 놓은 틀이 우울과 가깝게 맞물립니다.
이 틀이 하는 일은 자석과 비슷합니다. 모래밭에 자석을 굴리면 모래는 지나가고 쇳가루만 착 달라붙습니다. 하루도 그렇게 지나갑니다. 잘한 일이나 칭찬 들었던 말은 모래처럼 흘러가고, 모자랐던 대목만 남습니다. 그날이 유난히 나빴던 것이 아니라 무엇을 붙잡을지가 이미 정해져 있었던 것입니다.
그분도 그랬습니다. 그해 회사에서 받은 표창장은 서랍에 그대로 넣어 두었는데, 정작 그날을 떠올리면 단상에 오르다 발을 헛디딘 순간만 기억난다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우울증 원인을 스스로 가늠해 보려면 하루를 통째로 되짚을 필요가 없습니다. 오늘 잘 지나간 일 세 가지를 적어 두고, 그중 몇 가지가 저녁까지 기억에 남아 있는지만 보면 됩니다. 좋은 일이 적어서가 아니라 좋은 일이 기억에 남지 않는 쪽이라면, 기분의 문제라기보다 무엇을 남길지 정하는 틀이 한쪽으로 굳어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물론 이것은 진단이 아니라 상담이 필요할지 가늠해 보는 참고입니다.
아침이 나아진 뒤에도 남은 것
약도 이 대목에서 자기 몫을 합니다. 가라앉은 기분이 더 내려가지 않게 받쳐 주고, 잠과 식욕처럼 무너진 것들을 회복하는 데 힘이 됩니다. 실제로 그분도 약을 드시고 나서 아침에 몸을 일으키기가 한결 나아졌다고 하셨습니다. 진단과 약은 병원에서 의사와 상의하실 일이고, 상담은 그와 병행할 수 있는 또 다른 접근입니다. 다만 하루가 끝날 때 무엇이 남을지를 정하는 틀은 그대로여서, 좋아졌다가도 비슷한 일이 생기면 다시 예전처럼 모자란 것만 붙잡게 됩니다.
그분도 바로 그 점을 짚으셨습니다. 약을 먹고 아침은 나아졌지만, 하루를 마칠 때 남는 것은 예전과 똑같다고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그 틀은 어떻게 다뤄야 할까요. 마음을 고쳐먹는 것만으로는 잘 되지 않습니다. 이 틀은 말을 배우기도 전에 만들어져, 생각으로 판단하기 전에 이미 무엇을 붙잡을지 정해 버리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최면상담에서는 지금의 우울과 연결되어 있는 오래된 감정과 경험을 직접 다룹니다. 의식적으로 기억하지 못하는 어린 시절에 그 반응이 어떻게 시작되었는지, 무의시 경험을 다시 겪어 보며 살펴보는 방식입니다.
최면 속에서 떠오른 부엌
그분도 그렇게 시작했습니다. 최면 상태가 충분히 깊어진 뒤, 저녁마다 올라오던 그 답답함을 그대로 느껴 보았습니다. 오래지 않아 아주 어렸을 때의 부엌이 떠올랐습니다.
아이는 부엌 식탁 곁에서 말랑한 반죽을 손으로 꾹꾹 눌러 작은 모양을 만들고 있었습니다. 한쪽은 조금 두껍고 가장자리는 삐뚤했지만, 아이는 제 손으로 만든 것을 신이 나서 어른에게 내밀었습니다. 어른은 웃어 주거나 고개를 끄덕이기보다 튀어나온 부분부터 손가락으로 눌러 반듯하게 고쳐 주었습니다.
아이는 내민 손을 거두지 못한 채 어른의 손끝만 바라보았습니다. 어른에게는 조금 더 예쁘게 다듬어 준 일이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말도 트이기 전의 아이에게는 다른 감각이 남았습니다. 자기가 만든 것은 그대로 두면 안 되고, 잘한 것보다 먼저 고칠 곳이 있다는 느낌이었습니다.
그 부엌에서 아이가 익힌 것은 반죽 모양이 아니라 자기 것을 바라보는 방식이었습니다. 잘된 전체보다 삐뚤어진 한쪽이 먼저 눈에 들어오고, 괜찮은 부분보다 고칠 곳부터 찾는 반응이 몸에 익었습니다. 그 반응은 어른이 된 뒤에도 남아, 하루가 끝날 때마다 잘된 일은 지나치고 모자란 대목만 붙잡았습니다. 아무 일이 없는 날에도 저녁에 남는 것은 늘 부족했던 한 장면이었던 셈입니다.
그분은 어른의 마음으로 깊은 최면 상태에서 그 부엌에 다시 들어가 아이 곁에 앉았습니다. 이번에는 반죽을 손대어 고치지 않고, 아이가 만든 모양을 그대로 받아 들고 먼저 웃어 주었습니다. 삐뚤한 곳이 있어도 아이가 제 손으로 만들었다는 사실부터 알아주고, 고치지 않아도 괜찮다고 일러 주었습니다. 아이가 망설이다가 반죽을 다시 받아 자기 앞에 놓기까지 시간이 조금 걸렸다고 합니다.
기울어진 선반을 찍어 올린 날
요즘은 저녁에 남는 것이 달라졌다고 하셨습니다. 얼마 전에는 미뤄 두었던 거실 선반을 직접 달았는데, 오른쪽이 살짝 낮게 붙었습니다. 예전 같으면 낮은 쪽만 눈에 들어와 사진도 안 찍었을 텐데, 이번에는 그냥 찍어서 가족 단톡방에 올렸습니다. 사진을 올리고 나서야 자신이 그걸 아무렇지 않게 올렸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고 하셨습니다.
이유 없는 우울처럼 보이는 것에도 시작이 있습니다. 다만 그 시작이 기억이 생기기 전이라 스스로는 보이지 않을 뿐입니다. 기억나지 않는 것과 없는 것은 다릅니다.
오늘 저녁에도 하루를 되짚다가 모자랐던 한 가지만 남아 있다면, 그 한 가지가 오늘 하루에서 유일하게 남길 만한 일이어서가 아닙니다. 오래전에 무엇을 남길지 정하는 틀이 만들어졌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오래전에 만들어진 틀도 지금 다시 다룰 수 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