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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말에 뭐 했냐고 물으면 할 말이 없어요. 침대에서 휴대폰 화면만 넘기다가 해가 지고,
정신을 차려 보면 또 일요일 밤이에요. 설거지가 사흘째 쌓여 있는 걸 보면서도 몸이 안 일어나요.
그러다 불을 끄고 누우면 그때부터 제 탓을 하기 시작해요.
남들 다 하는 걸 나는 왜 못 하지, 나는 왜 늘 이 모양이지.
그렇게 두어 시간 저를 몰아세우다 잠들어요. 결국 제가 문제인 거겠죠."
삼십 대 후반의 직장인 한 분이 상담실에서 꺼낸 이야기입니다. 아무것도 하기 싫은 상태가 반년 넘게 이어지고 있다고 하셨습니다. 회사에서는 그래도 어떻게든 버틴다고 합니다. 대신 현관문을 닫는 순간 몸이 물먹은 옷처럼 무거워져, 가방을 든 채로 신발장 앞에 한참 앉아 있는 날이 많습니다. 옷을 갈아입고 저녁을 차리는 일이 감당하기 어려운 일처럼 느껴진다고요.
아무것도 하기 싫을 때 사람들이 가장 먼저 하는 일은 자신을 탓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에 이상한 점이 하나 있습니다. 몇 시간씩 자신을 몰아세우고 나면 다음 날은 조금이라도 나아져야 할 텐데, 실제로는 그런 밤을 보낸 다음 날이 오히려 더 무겁습니다.
아무것도 못 한 저녁에 머릿속에 떠오른 말을 그대로 떠올려 보십시오. "오늘은 너무 지쳤다"까지라면 그날의 상태에 대한 말입니다.
"나는 왜 늘 이 모양일까"라면 상태가 아니라 사람에 대한 판정입니다. 같은 하루를 친구가 보냈다면 뭐라고 말해 줬을지 떠올려 보십시오. 친구에게 건넬 말과 자신에게 한 말이 많이 다르다면, 지금 힘든 것은 무기력만이 아닙니다.
읽기도 전에 찍히는 ‘내 탓’ 도장
심리학에는 '심리도식'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어린 시절에 만들어져 세상일을 해석하는 기본 틀로 굳어진 마음의 습관을 가리킵니다. 그 가운데 "문제는 나에게 있다"는 쪽으로만 향하는 마음의 틀을 ‘결함 도식’이라고 부릅니다.
이 틀이 있으면 무슨 일이 생겼을 때 상황을 살피기 전에 결론이 먼저 나옵니다. 손에 도장 하나를 늘 쥐고 사는 것과 비슷합니다. 서류가 올라오면 내용을 읽고 판단해야 하는데, 읽기도 전에 '내 탓'이라는 도장부터 찍는 것입니다. 회의에서 말이 꼬여도, 주말 내내 몸이 안 움직여도, 찍히는 도장은 늘 같습니다.
무기력도 그 도장을 피해 가지 못합니다. 몸이 무거워 못 움직이는 것은 그날의 상태일 뿐인데, 도장이 찍히는 순간 "나는 왜 이 모양일까"라는 판정으로 바뀝니다. 그 판정이 기분을 더 가라앉힙니다. 기분이 가라앉으면 더 못 움직이고, 못 움직이면 도장이 또 찍힙니다. 아무것도 하기 싫은 상태를 처음 만든 것은 자책이 아니지만, 그 상태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게 붙드는 것은 대개 자책입니다.
몸을 일으켜도 남는 한마디
그분도 병원에 다니고 있었습니다. 무기력이 길어지고 잠과 입맛까지 함께 무너져 있을 때는 진료를 받는 것이 도움이 됩니다. 약이 바닥까지 가라앉은 기분을 끌어올려, 아침에 몸을 일으킬 힘을 조금씩 되찾게 해 주기 때문입니다.
심리상담에서 자책하는 말을 알아차리고 다시 따져 보는 연습도 실제로 도움이 됩니다. 그분도 이런 연습을 하며 출근하는 아침은 한결 나아졌다고 했습니다. 다만 힘든 저녁이 오면 "나는 왜 이 모양일까" 하는 말이 늘 생각보다 먼저 나왔다고 합니다. 알아차리고 따져 볼 새도 없이 결론이 이미 나와 있었기 때문입니다.
생각보다 먼저 나오는 결론은 마음먹는 것만으로 멈추기 어렵습니다. 의식적으로 마음을 다잡는 것은 결론이 나온 다음에야 가능한데, 이 결론은 그보다 먼저 나오기 때문입니다. 최면상담에서는 이처럼 생각보다 먼저 저절로 나오는 반응을 다룹니다. 지금 되풀이되는 감정과 이어져 있는 오래된 경험을 찾아, 그때 풀리지 않은 채 남은 감정을 다룹니다. 그 감정이 풀리면 같은 상황에서 저절로 나오던 반응이 달라집니다.
그분도 "나는 왜 이 모양일까"라는 결론이 처음 생긴 때를 찾아갔습니다. 깊은 최면에 들어가 머릿속에서 늘 떠들던 생각이 잠잠해지자, 아무것도 못 하고 앉아 있을 때마다 올라오던 느낌이 또렷해졌습니다. 뭔가 잘못한 것 같은데, 무엇을 잘못했는지는 알 수 없는 기분이었습니다. 그 느낌을 따라가ㅈ 오래된 장면 하나가 떠올랐습니다.
식탁 옆에서 미끄러진 물컵
말이 겨우 트였을 무렵의 집 안이었습니다. 아이가 식탁 옆에서 물컵을 옮기다 손에서 놓쳤습니다. 물이 바닥에 번지고 양말이 젖었습니다. 놀란 아이가 어른을 올려다봤는데, 걸레를 들고 온 어른의 첫마디는 "너는 왜 늘 그래"였습니다. 컵이 미끄러워서 그랬다는 말을 하려다 아이는 입을 닫았습니다. 얼마 뒤 장난감 바퀴가 빠졌을 때도 돌아온 말은 같았습니다.
어른에게는 걸레질 한 번으로 지나간 일이었을 겁니다. 하지만 말도 서툰 아이에게 그 일은 다르게 남았습니다. 컵이 왜 미끄러졌는지는 아무도 묻지 않았고, 잘못은 이미 아이에게 있는 것으로 정해져 있었습니다. 무슨 일이 생기면 상황보다 자기 잘못을 먼저 찾는 습관이 그렇게 손에 익어갔습니다.
그분은 깊은 최면중에 그 아이 곁에 다가가 앉아, 그때 아무도 묻지 않았던 것을 대신 물어 주었습니다. 그리고 컵이 미끄러진 것도, 실수한것도 괜찮다고 말해 주었습니다.
자책이 심한 분들은 대개 자기가 유난히 못난 사람이라고 여깁니다. 그러나 상담에서 만나 보면, 어릴 때 무슨 일이 생길 때마다 상황이 아니라 자기가 먼저 지적받던 시절이 있었던 경우가 적지 않습니다. 본인은 기억조차 못 하는 시절에 내려진 판정이 남아, 어른이 된 지금도 힘든 날마다 같은 결론을 내리고 있는 것입니다.
불 꺼진 방에서
그분은 요즘도 몸이 무거워 아무것도 못 하는 저녁이 있다고는 했습니다. 하지만 달라진 것은 그다음입니다. 예전 같으면 불 꺼진 방에서 자신을 몇 시간씩 몰아세웠겠지만, 이제는 "오늘은 여기까지 하자" 하고 잠이 든다고 하셨습니다.
오랫동안 미뤄 두었던 안부 문자에도 답을 보냈다고 합니다. 답장이 늦어 미안하다는 말은 한 줄만 쓰고, 그 뒤에는 요즘 무엇을 하며 지내는지 적었다고 하셨습니다.
아무것도 하기 싫은 날은 누구에게나 옵니다. 차이는 그다음에 생깁니다. 그런 밤, 자신에게 무슨 말을 하고 계십니까. 오늘도 "나는 왜 이 모양일까"가 저절로 나왔다면, 그 말은 오늘 하루를 보고 내린 판단이 아니라 아주 오래전부터 익어온 마음의 습관일 수 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