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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목소리가 아직도 귀에 울립니다. 소리를 지르는 동안에는 귀가 멍하고 눈앞이 좁아져서
후배 얼굴이 보이지도 않았어요. 정신을 차렸을 때는 심장이 쿵쿵거리고 손이 떨리고 있었습니다.
제가 무슨 말까지 했는지는 나중에 다른 사람한테 들었어요.
그 몇 초가 통째로 비어 있습니다."
사십 대 중반의 회사원 한 분이 상담 첫날 꺼낸 이야기입니다. 그날 있었던 일 자체는 큰일이 아니었다고 합니다. 후배가 보내야 할 자료가 아닌 다른 파일을 보냈고, 그걸 짚었더니 "아, 그거요? 그럴 수도 있죠" 하는 대답이 돌아왔습니다. 그다음은 잘 기억나지 않는다고 하셨습니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들고 있던 서류가 이미 책상 위에 흩어져 있었습니다.
그분을 오래 괴롭힌 것은 화가 났던 순간이 아니라 그 뒤였습니다. 집에 돌아와 불을 끄고 누우면 그 장면이 처음부터 다시 떠올랐습니다. 그 정도 일에 내가 왜 그랬을까. 답이 나오지 않으니 결론은 늘 같았습니다. 내가 이상한 사람이구나.
분노조절장애를 검색하다 이 글까지 들어오셨다면, 정말 알고 싶은 것은 아마 이것일 겁니다. 그 몇 초 동안 도대체 내 안에서 무슨 일이 일어난 걸까.
화를 알아차리기도 전에 지나간 몇 초
그분의 이야기를 순서대로 따라가 보면,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순서와는 정반대였습니다. 보통은 화가 난 뒤 소리를 지른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그분은 소리를 지르고 나서야 자신이 화가 났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화가 차오르는 것을 느끼고, 참을지 말지 고민하다가 결국 못 참은 것이 아닙니다. 고민할 틈 자체가 없었습니다. 신호가 들어온 뒤 반응이 나오기까지가 너무 짧아 의식적으로 판단할 시간이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일이 지나간 뒤 그 몇 초를 아무리 되짚어도 잘 떠오르지 않습니다. 기억력이 나빠서가 아니라, 그 순간에는 판단할 틈 자체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내 이야기와 비슷한지 가늠해 볼 단서가 하나 있습니다. 폭발한 다음 날, 그 일을 다시 떠올려 보십시오. 무엇이 가장 또렷하게 남아 있습니까. 잘못된 자료 자체가 또렷하다면 그 일에 화가 난 것입니다. 그런데 자료보다 "그럴 수도 있죠" 하던 말투나 표정이 더 또렷하다면, 그날 나를 건드린 것은 사건 자체가 아니라 그 신호였을 수 있습니다.
어떤 말투가 ‘손잡이’가 되는 순간
그렇다면 왜 신호 하나가 그렇게 큰 반응을 끌어낼까요. 한국 사람의 분노를 설명할 때 오래 쓰여 온 말 가운데 화병이 있습니다. 표현하지 못하고 삼킨 분노가 사라지지 않은 채 안에 쌓이는 상태를 가리킵니다. 분노조절장애의 폭발은 그렇게 쌓인 분노가 가득 찼을 때 일어납니다.
겨울철 카펫이 깔린 복도를 걸어가다 보면 이런 일을 겪을 때가 있습니다. 걷는 동안에는 아무 느낌도 없습니다.
그러다 문손잡이에 손이 닿는 순간, 정전기가 탁 하고 튑니다. 손잡이 자체가 문제인 것은 아닙니다. 복도를 걸어오는 동안 몸에 조금씩 쌓인 전기가 그 순간 한꺼번에 빠져나간 것입니다.
쌓인 분노도 이와 비슷합니다. 참는 동안에는 아무 느낌이 없고, 자신이 참고 있다는 사실조차 알아차리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그러다 문손잡이 같은 특정한 신호를 만나면 그동안 쌓인 분노가 한꺼번에 터집니다. 정전기가 아무 때나 튀지 않듯, 이 반응도 특정한 신호에서 더 쉽게 나타납니다. 누군가는 무시당했다고 느낄 때, 누군가는 재촉당할 때 이런 반응이 나옵니다.
그분에게는 잘못한 쪽이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 넘어가려는 순간이 문손잡이 같은 신호였습니다. 그런데 정작 본인은 자신을 잘 참는 사람이라고 여겨 왔다고 하셨습니다. 회사에서도 집에서도 웬만한 일은 그냥 넘겼고, 그래서 자신이 분노조절 문제로 상담을 받게 될 줄은 몰랐다고 합니다.
숫자를 세기도 전에 끝나 버리는 순간
그동안 아무것도 해 보지 않은 것도 아니었습니다. 화가 올라오면 숫자를 세라는 말을 듣고 세어 봤고, 그 상황에서 잠깐 벗어나라는 말을 듣고 화장실로 나가 보기도 했습니다. 병원에서 처방받은 약도 먹었습니다.
약은 충동의 세기를 낮춰 폭발의 횟수와 강도를 줄이는 데 도움이 됩니다. 숫자를 세거나 잠시 그 상황에서 벗어나는 것도 당장의 순간을 넘기는 데 도움이 됩니다. 다만 이런 방법은 모두 화가 올라오는 것을 느낀 뒤에야 쓸 수 있습니다. 그분처럼 알아차리기도 전에 반응이 먼저 터져 버리면, 써 볼 기회 자체가 오지 않습니다. 게다가 참아서 넘긴 분노는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다시 안에 쌓입니다.
그렇다면 알아차리기도 전에 터져 버리는 반응은 어디서부터 손대야 할까요.
마음먹는 것만으로 바꾸기 어려운 반응이 있습니다. 의식은 상황을 살피고 판단한 뒤 행동을 결정하지만, 이 반응은 그런 절차를 거치지 않고 먼저 나옵니다. 그래서 다음에는 참겠다는 다짐도 폭발이 끝난 뒤에야 작동합니다. 다짐이 약해서가 아니라, 그 다짐을 실천할 틈도 없이 이미 상황이 끝나 있기 때문입니다.
최면상담에서 다루는 것이 바로 이 부분입니다. 지금 터지는 분노와 이어진 오래된 감정, 그리고 그 반응이 처음 만들어진 경험을 찾아 함께 다룹니다. 기억으로는 남아 있지 않은 무의식의 경험이라, 혼자 앉아 곱십는 것만으로는 잘 떠오르지 않습니다.
그분도 이 과정을 밟았습니다. 최면이 충분히 깊어진 상태에서 후배의 그 대답을 들었을 때 가슴에서 확 치밀던 느낌이 그대로 되살아났습니다. 그러자 본인도 전혀 생각하지 못한 장면이 떠올랐습니다.
최면 속에서 다시 만난 빨간 자동차
말이 아직 서툴던 무렵의 집 안이었습니다. 아이에게는 아끼는 장난감 자동차가 하나 있었습니다. 빨간 자동차였고, 잠들 때도 손에 쥐고 있었습니다. 그날 놀러 온 또래 아이가 그 자동차를 밟아 바퀴 하나가 부러졌습니다.
아이는 울면서 부러진 자동차를 들고 어른에게 갔습니다. 그런데 돌아온 말은 "됐다, 그만해. 그거 하나 가지고"였습니다. 밟은 아이는 이미 다른 놀이를 하고 있었습니다. 아무도 미안하다고 하지 않았고, 그렇게 끝이었습니다.
아이는 부러진 바퀴의 까끌한 단면을 손에 쥔 채 서 있었습니다. 목까지 차올랐던 울음을 다시 삼켰습니다. 귀가 뜨거웠습니다.
그 자동차가 그 뒤에 어떻게 됐는지, 누가 고쳐 주었는지는 그 장면에서 떠오르지 않았습니다. 남은 것은 손에 쥐고 있던 까끌한 감촉과 아무도 그 일을 다시 묻지 않았다는 사실뿐이었습니다.
어른들에게는 아이들끼리 흔히 있을 법한 일이었을 겁니다. 그러나 아직 말로 따질 줄 모르던 아이는 그 일을 겪으며, 분한 일을 당해도 말해 봐야 소용없고 잘못한 쪽은 아무렇지 않게 넘어간다고 받아들이게 되었습니다.
그 뒤로 아이는 분한 일이 생길 때마다 그냥 삼켰습니다. 삼키는 편이 나아서가 아니라, 그것 말고는 배운 방법이 없었습니다. 그렇게 삼킬 때마다 그 분함은 사라지지 않고 안에 더 쌓였습니다.
그렇게 분함이 수십 년 동안 쌓인 뒤에는, 잘못한 쪽이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 넘어가려는 신호 하나만으로도 충분했습니다. "아, 그거요? 그럴 수도 있죠"라는 말이 그분에게는 문손잡이였던 셈입니다.
그 장면 속에서 그분은 그때 하지 못했던 말을 했습니다. 그건 내 거였다고, 미안하다는 말을 들었어야 했다고, 그냥 넘어갈 일이 아니었다고 말했습니다. 수십 년 동안 삼킨 채 끌고 온 말이었습니다.
여기서 놓치기 쉬운 부분이 하나 있습니다. 폭발한 뒤 자신을 몰아세우며 느끼는 자책도 밖으로 풀리지 못한 채 안에 남는 감정이라는 점입니다. 참았다가 터뜨리고, 터뜨린 자신을 또 나무라며 감정을 삼키는 동안 안에 쌓인 분노는 줄지 않습니다.
이번에는 볼펜을 내려놓았습니다
비슷한 일이 다시 있었다고 합니다. 후배가 또 파일을 잘못 보냈고, 이번에도 "아, 그거요" 하는 대답이 돌아왔습니다. 하지만 그분은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볼펜을 내려놓고 모니터를 후배 쪽으로 돌린 뒤, 어디서 어긋났는지 같이 보자고 했다고 합니다.
목소리가 커지지 않았습니다. 참느라 힘을 준 것도 아니었다고 하셨습니다. 그날 저녁에는 그 일이 떠오르지도 않았고, 오랜만에 아들과 야구 중계를 끝까지 봤다고 합니다.
선을 넘고 나서야 알게 되는 일이 반복된다면, 지금까지는 그 몇 초를 어떻게든 붙잡으려 애쓰셨을 겁니다. 다음에는 참아야지, 다음에는 숫자를 세어야지 하고요. 하지만 그 몇 초는 의식적으로 붙잡고 대처하기에는 너무 짧습니다. 이미 가득 차 있던 분노가 터지는 순간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남는 물음은 하나입니다. 그 안을 가득 채운 분노는 언제부터, 무엇을 삼키며 쌓였을까. 그 답은 지난주 회의나 어젯밤 식탁에 있지 않습니다. 훨씬 오래전, 아무도 미안하다고 하지 않은 채 끝나 버린 어느 날에 있을 수 있습니다.
여기까지 읽으셨다면 아마 오늘도 무언가를 삼키셨을 것입니다. 그렇게 삼킨 것을 다시 꺼내 보는 일은 혼자서는 잘 되지 않습니다. 의식적으로 기억하지 못하는 경험은 혼자 생각한다고 쉽게 떠오르지 않기 때문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