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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부는 깨끗한 편이라고 하셨어요. 그 말을 듣고 나오는데 오히려 더 막막했습니다.
회의실에서 제 차례가 되면 목덜미부터 뜨거워지고, 볼이 화끈거리는 게 저한테도 느껴지거든요.
사람들이 그걸 다 보고 있다고 생각하면 준비한 말이 반으로 줄어요.
피부가 멀쩡하면 저는 뭐가 문제인 겁니까."
스물아홉 여성분이 첫 상담에서 들려주신 말입니다. 광고 대행사에서 3년째 일하고 있는 그분은 월요일 오전 회의마다 돌아가며 지난주 진행 상황을 말한다고 했습니다. 자기 순서가 다가오면 손에 쥔 물컵이 미끄러질 만큼 땀이 났고, 얼굴이 빨개지는 이유를 몇 달째 검색해 봤다고도 하셨습니다.
얼굴 홍조 원인을 검색하면 대개 모세혈관, 자외선, 세안 방법처럼 피부와 관련된 설명부터 나옵니다. 그래서 피부에 문제가 없다는 말을 들으면 오히려 어디서 원인을 찾아야 할지 막막해집니다. 얼굴을 붉게 만드는 반응이 피부에서 시작되지 않는 경우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분도 이상하게 여긴 것이 하나 있었습니다. 혼자 있을 때나 친한 친구 두엇과 함께 있을 때는 얼굴이 멀쩡하다는 점이었습니다. 같은 얼굴, 같은 피부인데 왜 어떤 상황에서만 붉어질까요.
같은 얼굴인데 왜 회의실에서만 뜨거울까
몸에는 위험을 빠르게 알아차리고 반응을 준비시키는 편도체가 있습니다. 편도체는 무슨 일인지 따져 보기 전에 몸부터 움직이게 합니다. 여러 사람의 눈길을 위험하게 받아들이도록 몸에 익어 있다면, 시선이 모이는 순간 위험 신호가 작동하고 얼굴 쪽 혈관이 넓어집니다. 피가 몰리면서 얼굴이 붉어집니다.
슬픈 장면을 보다가 눈물이 핑 도는 순간을 떠올리면 이해가 쉽습니다. 눈에게 슬프다고 알려 준 적도 없고, 눈물을 낼지 말지 눈이 결정한 것도 아닙니다. 얼굴이 붉어지는 것도 같은 종류의 반응입니다. 피부가 스스로 판단해 붉어지는 것이 아니라, 위험하다는 신호를 받은 뒤 혈관이 따라 움직이는 것입니다.
여기에 한 가지가 더해집니다. 얼굴이 뜨거워지는 것을 스스로 알아차리면 그 사실이 다시 위험 신호가 되어 몸의 반응을 더 키웁니다. 안면홍조 원인을 피부에서만 찾다가 답을 못 찾는 분들이 많은 것도 그래서입니다.
그분도 이 대목이 헷갈렸다고 했습니다. 얼굴이 붉어지는 것이 문제인지, 붉어질까 봐 미리 굳는 것이 문제인지 스스로도 구분하기 어려웠다고 합니다.
얼굴이 식는 순간을 보면 단서가 보인다
어느 쪽에 가까운지는 붉어질 때보다 가라앉을 때를 보면 어느 정도 가늠할 수 있습니다. 말할 차례가 다른 사람에게 넘어가는 순간 얼굴이 눈에 띄게 식는다면, 몸의 조건보다 상황 변화가 먼저 반응을 움직이고 있을 가능성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그분의 경우가 그랬습니다. 옆자리 사람에게 순서가 넘어가고 사람들의 고개가 그쪽으로 돌아가면, 얼굴에서 열이 빠지는 것이 본인에게도 느껴졌다고 합니다. 이것만으로 확실히 구분할 수는 없지만, 어디부터 살펴볼지 정하는 데는 도움이 됩니다.
물론 피부 쪽에 원인이 있는 경우도 있습니다. 붉어지는 양상이 늘 비슷하고, 더운 곳이나 매운 음식처럼 몸의 조건에 따라 달라진다면 피부과에서 확인하는 것이 먼저입니다.
진료를 받고 필요한 치료를 받은 뒤 붉은 기가 줄어드는 분들도 있습니다. 다만 피부 진료에서는 사람들의 눈길이 왜 위험 신호가 되었는지까지 살피지는 않습니다. 그것은 피부의 문제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 반응은 생각보다 먼저 일어납니다. 괜찮다고 아무리 되뇌어도 그 말을 다 하기 전에 얼굴은 이미 뜨거워져 있습니다.
그래서 최면상담에서는 얼굴이 붉어지기 직전에 몸에서 먼저 나타나는 반응부터 살핍니다. 그다음에는 남의 눈길이 위험 신호가 된 무렵의 경험과, 그때 아이가 혼자 감당했던 부끄러움을 다룹니다.
목덜미의 열감이 데려간 어느 낮
그분의 최면상담도 회의실에서 뜨거워지던 목덜미의 감각부터 따라갔습니다. 깊은 최면 상태에서는 평소에 흘려보내던 몸의 신호가 오히려 또렷해집니다. 그 감각을 다시 불러오자 회의실과는 아무 상관이 없는 어느 낮이 떠올랐습니다.
친척 어른들이 방문한 낮이었습니다. 마루에는 어른들이 둘러앉아 있었고, 아이와 언니가 그 앞에 서 있었습니다. 친척 어른들은 두 아이를 기둥 쪽에 나란히 세웠습니다.
어른의 손이 언니 머리 위에 한 번, 아이 머리 위에 한 번 얹혔습니다. "언니는 벌써 여기까지 왔는데, 얘는 아직 여기네." 그러고는 아이의 턱을 들어 얼굴을 왼쪽으로 돌렸다가 오른쪽으로 돌렸습니다. "얘는 누구를 닮았을까." 방 안 사람들의 눈이 모두 아이의 얼굴로 모였습니다.
아직 자기 이름을 또박또박 말하지 못하던 무렵의 일이었습니다. 아이는 고개를 숙였고, 볼과 목덜미가 뜨거워졌습니다. 그 얼굴을 보고 어른들이 한 번 더 웃었습니다. 아이는 기둥 뒤로 몸을 반쯤 숨겼습니다.
이 대목에서 그분의 목덜미가 땀에 젖었습니다. 말도 한참 끊겼다가 다시 이어졌습니다.
그 낮에 아이가 배운 것은 자기 키나 생김새가 아니었습니다. 여러 사람이 한꺼번에 나를 보는 것은 곧 누군가와 견주어진다는 뜻이었습니다. 이런 경험이 몸에 익고 나면, 사람들의 눈길이 모이는 순간 몸이 먼저 반응합니다.
홍조로 힘들어하는 분들은 대개 자신이 남달리 소심해서 그렇다고 여깁니다. 그런데 순서를 따라가 보면 반대인 경우가 있습니다. 얼굴이 먼저 붉어지기 시작했고, 그 일이 되풀이되면서 사람들 앞에 서는 것을 점점 더 조심하게 된 것입니다.
깊은 최면 중에 어른이 된 그분이 마루로 걸어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어린시절의 자신에게 알려 주었습니다. ‘어른들이 너를 해꼬지 하려는 것도 아니고, 뭐라고 하는 것도 아니라고. 안전하고 별일 아니니까 힘들게 받아들일 필요 없다고. 편하게 있어도 된다고’
사람들의 눈길이 더 이상 예전처럼 부담스럽지 않았습니다
상담 후 그분은 월요일 회의에서 팀 자료를 앞에 나가 설명하는 일을 맡게 되었다고 합니다.
예전에는 자기 차례가 가까워지기만 해도 사람들의 시선부터 의식했고, 목덜미가 뜨거워지면서 준비한 말조차 제대로 이어 가기 어려웠습니다.
그런데 상담 이후에는 여러 사람의 시선이 자신에게 모여도 예전처럼 얼굴이 쉽게 달아오르지 않았고, 발표를 앞두고 미리 긴장하는 일도 크게 줄었다고 했습니다.
사내 교육이 있던 날에는 옆자리의 신입 직원이 자기소개를 하며 얼굴을 붉히는 모습을 보고도 자신의 차례를 걱정하기보다 그 직원에게 고개를 끄덕여 주고, 교육이 끝난 뒤 물 한 잔을 건넬 여유도 생겼습니다.
달라진 것은 단순히 얼굴의 붉은 기만이 아니었습니다. 사람들의 눈길을 받는 순간마다 자동으로 올라오던 긴장과 부끄러움이 줄어들면서, 여러 사람 앞에 서는 상황 자체가 예전만큼 부담스럽지 않게 된 것입니다.
얼굴 홍조의 원인이 피부가 아니라 특정 상황에서 반복되는 무의식의 자동반응과 연결되어 있다면, 최면상담에서는 얼굴이 붉어지는 현상만 억누르기보다 그 반응이 처음 만들어진 경험과 감정을 찾아 함께 다룹니다.
그 원인이 해소되면서 사람들의 시선을 위험하게 받아들이던 반응도 달라지고, 얼굴이 붉어지는 증상 역시 자연스럽게 줄어들 수 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