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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원래 사람을 안 좋아하는 성격이라고만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지난주에 동창 모임 연락을 받고 사흘을 앓았어요.
날짜가 가까워질수록 속이 울렁거리고 뒷목이 뻣뻣해지더니, 결국 전날 밤에 몸살이 났다고 문자를 보냈습니다.
보내고 나니 그렇게 후련할 수가 없었어요. 저는 그 후련함이 더 무서웠습니다."
설계 일을 하는 마흔 초반 남성분이 상담 게시판에 보내온 글입니다. 사람이 싫은 것은 아니라고 몇 번이나 덧붙이셨습니다. 사람 만나기 싫을 때가 언제부터 이렇게 잦아졌는지는 본인도 잘 모르겠다고 했습니다.
실제로 이분은 모임에 나가면 잘 웃고 이야기도 잘합니다. 먼저 술을 따르고 계산도 자주 합니다. 하지만 집에 돌아온 뒤가 문제였습니다. 현관에서 신발을 벗자마자 방으로 들어가 불을 끄고 누워 있어야 했습니다.
그래서 오랫동안 자신을 탓했습니다. 스스로 사회성이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했고, 회사에서 받은 성격 검사에서 내향형이 나온 뒤로는 그것이 이유라고 여겼습니다. 그런데 한 가지는 설명되지 않았습니다. 혼자 있는 저녁도 딱히 좋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사람 만나기 싫을 때, 많은 분들이 이것을 자기 성격의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내향적인 사람에게 혼자 있는 시간은 기운을 회복하는 시간이 됩니다.
그런데 이분은 혼자 있는 저녁에도 마음이 가라앉지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사람을 피하게 만드는 이유가 성격 말고 다른 데 있을 수도 있습니다.
접질린 발목으로 걷던 걸음
마음이 어떤 상황을 위험하다고 받아들이면, 그 상황을 피하는 순간 불편이 곧바로 가라앉습니다. 이렇게 피해서 괜찮아지는 경험이 쌓이면 피하는 행동 자체가 익숙해집니다. 심리학에서는 이런 학습을 회피라고 부릅니다. 단지 무서워서 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하지 않는 편이 매번 덜 힘들기 때문에 점점 피하는 쪽을 먼저 선택하게 되는 것입니다.
발목을 접질려 본 분은 아실 겁니다. 아픈 동안에는 그쪽에 힘을 덜 싣고 걷게 됩니다. 그때는 그렇게 걷는 것이 가장 나은 방법입니다. 그런데 그 상태로 오래 지내면 발목이 괜찮아진 뒤에도 한동안 같은 걸음걸이가 남습니다.
사람을 피하는 반응도 이와 비슷합니다. 처음에는 아픈 쪽을 딛지 않으려던 걸음이었지만, 오래 지나면 원래 자기 걸음걸이처럼 익숙해집니다. 그러다 보면 본인도 그것을 자기 성격이라고 여기게 됩니다.
이분도 그랬습니다. 사람이 싫은 게 아니라 만나기 전부터 이미 지친다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아팠던 걸까요. 다가갔을 때 돌아오는 반응이 없던 경험이 반복되면 더는 기대하지 않게 됩니다. 그다음부터는 누군가에게 다가가는 일 자체가 손해처럼 느껴집니다. 사람이 무서워서가 아니라, 기대해도 채워지지 않을 것 같아서 먼저 물러서는 것입니다.
혼자 지낸 뒤 무엇이 남는가
성격과 상처는 겉으로만 보면 비슷해 보입니다. 둘 다 사람을 덜 만나는 모습으로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내향적인 성격 때문인지 아닌지는 사람들과 있을 때보다 혼자 지낸 뒤를 보면 더 잘 드러납니다.
내향적인 사람은 며칠 혼자 지내며 기운을 채우고 나면 누군가가 슬슬 궁금해집니다. 먼저 연락하지는 않더라도 다시 사람을 만나고 싶은 마음이 생깁니다.
반대로 피하는 반응이 오래 굳은 경우에는 며칠 혼자 지내도 그런 마음이 잘 생기지 않습니다. 남는 것은 안 만나도 된다는 안도뿐입니다. 이것만으로 무엇이라 단정할 수는 없지만, 자신이 어느 쪽에 가까운지 가늠해 보는 데는 도움이 됩니다.
이분은 자신이 어느 쪽에 가까운지 금방 알았다고 했습니다. 혼자 지낸 주말이 끝나도 누구 얼굴 하나 떠오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쯤에서 대부분 두 가지 방법을 시도합니다. 하나는 성격 탓이라고 정리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억지로라도 사람을 만나 보는 것입니다.
실제로 나가 보는 것은 도움이 됩니다. 피하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사람 만나는 일이 실제보다 크게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대화를 이끄는 방법을 익히는 것도 도움이 되고, 긴장이 심할 때 병원에서 도움을 받으면 그날 모임을 견디기가 수월해지기도 합니다.
이분도 몇 번은 마음먹고 모임에 나갔습니다. 그런데 사람들과 잘 지내고 돌아온 다음에도 새 연락이 오면 다시 손이 멈췄습니다. 한 번 잘 해냈다고 해서 이미 익숙해진 반응까지 사라지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익숙해진 반응은 어떻게 다뤄야 할까요. 모임에 나가 보자고 마음먹는 것은 의식적으로 할 수 있는 일입니다. 하지만 연락을 받은 순간 속이 먼저 울렁거리는 반응은 생각으로 조절하기 전에 시작됩니다. 의식적인 노력만으로는 잘 바뀌지 않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최면상담에서는 바로 지금 올라오는 이 반응을 다룹니다. 같은 반응이 처음 만들어지던 무렵의 경험과 그때 남은 감정까지 함께 살펴봅니다.
부엌 앞에서 두 팔을 들던 아이
이분의 상담도 그 감각에서 시작했습니다. 깊은 최면에 들어간 뒤, 연락을 받을 때마다 느끼던 울렁거림을 다시 느꼈습니다. 그 감각이 뚜렷해지자 뜻밖의 장면 하나가 떠올랐습니다.
한낮의 집 안입니다. 이제 막 혼자 걸어 다니기 시작한 아이가 부엌 쪽으로 걸어갑니다. 어른은 개수대 앞에 서서 그릇을 씻고 있습니다. 아이가 어른의 다리에 매달려 두 팔을 위로 듭니다.
어른이 아이를 한 번 안아 올렸다가 곧 바닥에 내려놓습니다. 아이가 다시 팔을 듭니다. 이번에는 어른이 아이의 손을 떼어 방 쪽으로 살짝 밀어 둡니다.
아이는 문턱 앞에 앉아 바퀴 달린 장난감을 앞뒤로 굴립니다. 그러다 부엌 쪽을 한 번 돌아보고 다시 장난감을 굴립니다. 나중에는 부엌을 돌아보지도 않습니다. 비슷한 오후가 여러 날 이어졌다고 합니다.
어른에게는 설거지를 하다가 아이를 몇 번 떼어 놓은 평범한 낮이었을 겁니다. 하지만 아직 말을 제대로 못 하던 아이에게 남은 경험은 달랐습니다. 다가가도 오래 안겨 있지는 못한다는 것, 그러니 굳이 다가갈 필요가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장면 속에서 그분은 부엌으로 걸어 들어가 아이를 안아 올렸습니다. 이번에는 바로 내려놓지 않았습니다. 아이가 몸을 비틀며 내려가겠다고 할 때까지 그대로 안고 있었습니다. 아이는 한참 뒤에야 스스로 내려가 장난감 쪽으로 걸어갔습니다. 이번에는 장난감을 굴리다 말고 부엌을 돌아보지 않았습니다.
상담을 시작할 때 이분은 팔짱을 끼고 앉아 있었습니다. 눈을 떴을 때는 두 손이 무릎 위에 풀려 있었습니다.
부모가 나쁜 사람이 아니었다는 이유로 이 대목을 그냥 넘기는 분이 많습니다. 하지만 그때 아이에게 남은 것은 어른의 사정이 아니라 아이 스스로 내린 판단이었습니다. 어른이 바빴다는 사정을 나중에 이해하게 되더라도, 그때 만들어진 판단까지 저절로 바뀌는 것은 아닙니다.
국밥집에서 두 시간이 흘렀습니다
몇 년째 다음에 보자는 말만 주고받던 후배가 있었습니다. 이번에는 이분이 먼저 날짜를 적어 문자를 보냈습니다.
만나서는 국밥집에 두 시간 넘게 앉아 있었다고 합니다. 가게를 나오면서 다음 달에 또 보자고 먼저 말한 사람도 이분이었습니다. 집에 돌아와서는 불을 켜 둔 채 소파에 앉아 있었습니다. 예전 같으면 그 저녁에는 방문을 닫고 누워 있었을 겁니다.
지금 이 글을 읽다가 다음 주 약속 하나가 떠올랐다면, 그리고 떠오르자마자 어떻게 미룰지부터 생각났다면 한 가지만 짚어 보시면 됩니다. 혼자 지낸 다음 날, 사람이 조금이라도 그리워지던가요.
그리움 대신 안 만나도 된다는 안도만 남는다면, 그것은 단지 조용한 성격 때문이 아닐 수 있습니다. 다가가도 돌아오는 것이 없던 시절에 익숙해진 반응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반응은 마음을 다잡는다고 해서 쉽게 사라지지 않습니다. 바꿔야 할 것이 성격이 아니라면, 성격을 고치려는 노력만으로는 달라지기 어렵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