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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하철에서 맞은편에 앉은 사람들이 전부 저를 보고 있는 것 같아요.
아니라는 거 압니다. 아는데도 고개가 안 들려요.
휴대전화 화면만 보고 있는데, 화면에 뭐가 떠 있는지는 하나도 모르겠고
제 옆얼굴이랑 뒤통수만 계속 신경 쓰여요."
시선공포증으로 센터에 오신 삼십 대 중반의 직장인 한 분이 처음 꺼낸 말입니다. 아침 출근길 지하철이 첫 번째 고비였고, 회사에 들어서면 두 번째 고비가 왔습니다. 사무실 복도를 걸을 때면 등 뒤에서 누군가 자신을 보고 있는 것 같아 자기 걸음까지 어색하게 느껴졌다고 하셨습니다.
점심시간에는 편의점 계산대 줄이 힘들었습니다. 뒤에 선 사람이 자기를 보고 있는 것 같아 지갑에서 카드를 꺼내는 손까지 굳었습니다. 하루에 몇 번씩 이런 순간을 지나고 나면 저녁에는 아무 데도 가고 싶지 않았다고 합니다.
주변에 이야기하면 돌아오는 말은 대개 비슷했습니다. 신경 쓰지 마라, 아무도 너를 안 본다는 말이었습니다. 맞는 말이라 더 답답했습니다. 아무도 자신을 보고 있지 않다는 것을 본인이 제일 잘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지나온 뒤, 무엇이 기억에 남았을까
이럴 때 자기 상태를 한 번 가늠해 볼 수 있는 방법이 있습니다. 사람이 많은 곳을 지나온 뒤, 그 장면을 다시 떠올려 보는 것입니다.
그곳에 있던 사람들의 얼굴이나 옷차림이 하나라도 떠오른다면 주의가 바깥을 향해 있었다는 뜻입니다. 반대로 그때 내 걸음이 어땠을지, 내 표정이 어땠을지만 떠오른다면 주의는 줄곧 자기 자신을 향해 있었던 것입니다. 의학적인 진단은 아니지만 자기 상태를 가늠해 보는 데 도움이 됩니다.
그분에게 물었더니 잠시 생각하다 이렇게 답하셨습니다. "그러고 보니 지하철에서 내리고 나면 앞에 누가 앉아 있었는지 하나도 기억이 안 나요. 제가 어떤 표정으로 앉아 있었을지만 계속 떠올라요."
몸이 먼저 굳는 순간
우리 뇌에는 주변이 안전한지 위험한지를 빠르게 살피는 데 관여하는 편도체라는 부위가 있습니다. 위험하다고 판단하면 생각보다 먼저 몸이 굳고 심장이 빨리 뛰기도 합니다. 무엇을 위험으로 받아들이는지는 타고난 것만으로 정해지지 않습니다. 살아오면서 겪은 일이 그 판단을 만듭니다. 사람의 시선이 불편한 경험과 여러 번 이어져 있었다면, 시선 자체를 위험 신호로 익힐 수 있습니다.
한 번 발목을 접질린 사람은 계단 앞에서 몸이 먼저 굳습니다. 그때부터 발끝을 내려다보며 한 칸씩 내려갑니다. 그런데 발을 계속 확인할수록 걸음은 더 어색해집니다. 평소에는 저절로 되던 일을 하나하나 의식해서 확인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시선공포증에서도 비슷한 일이 벌어집니다. 사람들의 눈길을 느끼는 순간 몸이 먼저 긴장하면 주의가 바깥에서 자기 자신으로 옮겨 갑니다. 내 표정이 어떤지, 걸음이 어색하지 않은지 스스로 확인하기 시작합니다. 확인할수록 몸은 더 뻣뻣해지고, 그렇게 굳은 자신을 다시 확인하게 됩니다.
그분도 이 대목에서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사람들 앞에서는 팔을 어디에 두어야 자연스러운지조차 모르겠다고 하셨습니다.
병원에서 약을 처방받는 분도 있습니다. 약은 지나치게 예민해진 반응을 가라앉혀 사람들 앞에서 몸이 굳는 정도를 줄이는 데 힘이 됩니다. 눈을 마주치는 연습이나 사람 많은 곳에 조금씩 나가 보는 훈련도 그 상황을 견디는 힘을 키워 줍니다. 다만 눈길 자체가 언제부터 위험 신호가 되었는지는 이런 방법들로 밝혀지지 않습니다.
머리로는 아무도 나를 보지 않는다는 것을 압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의 시선이 느껴지면 몸이 먼저 굳습니다. 생각하기 전에 반응이 먼저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마음을 다잡는 것은 그 반응이 시작된 뒤에야 가능해서 늘 한 발 늦습니다.
최면상담에서는 이 자동반응이 시작된 경험을 다룹니다. 사람들 앞에서 올라오는 느낌을 실마리로 삼아, 시선을 위험으로 익히게 된 오래된 경험까지 거슬러 올라갑니다. 그 경험에 남아 있던 감정이 풀리면 같은 상황에서 저절로 반복되던 반응도 달라집니다.
장롱 앞에서 팔을 찾던 아이
그분의 상담도 이런 흐름으로 진행됐습니다. 최면이 충분히 깊어지자 머릿속에서 자기 모습을 확인하던 생각이 잦아들었고, 사람들 앞에서 뻣뻣해질 때 목 뒤가 조여 오던 느낌만 또렷하게 남았습니다. 그 느낌을 따라가자 오래된 장면 하나가 떠올랐습니다.
아직 말이 서툴던 시절, 집 안 방바닥이었습니다. 아이가 장롱 앞에 앉아 티셔츠를 머리에 뒤집어쓰고 팔을 넣을 곳을 더듬고 있습니다. 옆에 앉은 어른이 아이의 손과 얼굴을 번갈아 봅니다. 팔이 한참 안 나오자 어른이 묻습니다. "이렇게 하는 거 아니야?"
아이는 손을 멈추고 어른의 얼굴부터 봅니다. 다시 팔을 넣어 보고, 또 어른을 봅니다. 그날만이 아니었습니다. 물을 마실 때도 숟가락을 들 때도 어른의 눈은 아이의 손끝을 따라갔고, 같은 물음이 뒤따랐습니다.
어른에게는 아이를 챙기는 일이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아이에게 남은 것은 달랐습니다. 무엇을 하든 누군가 지켜보고 있고, 다 하고 나면 확인을 받아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어른이 방에 없는 날에도 아이는 옷을 입기 전에 방문 쪽을 한 번 돌아봤습니다.
그 어른이 왜 그렇게 하나하나 짚었는지는 장면에서 끝내 드러나지 않았습니다.
깊은 최면 안에서 그분은 그 방으로 다시 들어갔습니다. 아이 옆에 앉았지만 아이의 손을 지켜보지 않았습니다. 팔이 안 나와 아이가 옷 속에서 버둥거려도 짚어 주지 않고 기다렸습니다. 아이가 머리를 빼내고 먼저 얼굴을 확인하려 하자, 이번에는 그분이 잘하고 있으니 자신을 보지 않아도 된다고 말해 주었습니다.
아이는 나머지 팔을 스스로 넣었습니다. 옷을 다 입고 일어선 아이는 방문 쪽을 돌아보지 않고 그대로 밖으로 나갔습니다. 그 장면을 이야기하는 동안 감은 눈꺼풀 아래에서 빠르게 움직이던 눈도 천천히 잦아들었습니다.
시선공포증으로 오시는 분들은 남의 눈을 문제로 여기고 오십니다. 그런데 사람들 앞에서 몸을 굳게 만드는 것은 실제로 향해 있는 시선이 아니라, 아무도 보지 않을 때도 이어지는 자기 확인입니다. 그 자기 확인이 시작된 경험을 다시 다루면 남의 시선도 예전만큼 크게 다가오지 않게 됩니다.
친구의 이야기가 남아 있던 날
요즘 그분은 몇 해 동안 미뤄 온 친구와 저녁을 먹었다고 하셨습니다. 매번 다음에 보자고만 하다가 이번에는 본인이 먼저 날을 잡아 연락했습니다.
두 시간 넘게 마주 앉아 있었다고 합니다. 집에 돌아와 앉았는데 친구가 이직을 고민한다는 이야기와 아이 이름을 아직 못 정했다는 이야기가 그대로 기억났습니다. 그동안은 누구를 만나고 와도 상대가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 잘 남지 않았습니다.
지하철로 돌아오는 길에는 휴대전화를 꺼내지 않았습니다.
시선공포증은 남들이 실제로 나를 보고 있느냐 아니냐의 문제가 아닙니다. 사람들의 눈길을 느끼는 순간 주의가 바깥에서 자기 자신으로 돌아오고, 그때부터 스스로를 계속 확인하기 시작하는 반응입니다.
오늘도 지하철에서 고개를 들지 못했다면, 사무실 복도를 지나며 걸음이 어색해졌다면, 그것은 마음이 약해서가 아닙니다. 사람의 시선을 위험으로 익혀 둔 오래된 반응이 아직 남아 있는 것입니다. 이런 반응은 아무도 나를 보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머리로 아는 것만으로는 쉽게 사라지지 않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