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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신 건 어젠데 오늘 하루를 통째로 날립니다. 눈 뜨면 속이 뒤집히고 머리가 지끈거리는 건
그렇다 쳐요. 진짜 힘든 건 따로 있습니다. 어제 내가 무슨 말을 했는지 떠올리다 말고
휴대전화를 엎어 놓습니다. 누가 뭐라고 한 것도 아닌데 하루 종일 가슴이 조마조마하고
그러다 저녁이 되면 또 한 캔을 땁니다.
영업 일을 하는 삼십 대 후반 남성분이 상담에서 들려주신 이야기입니다. 일주일에 두세 번 술자리가 있었고, 다음 날 아침이면 어김없이 술병이 났습니다. 해장국을 먹고 숙취해소제까지 챙겨 마셔도 오후까지 몸이 무거웠다고 합니다.
하지만 정작 견디기 힘든 것은 몸의 숙취가 아니었습니다. 속이 가라앉고 두통이 잦아든 뒤에도 전날 일이 자꾸 떠올랐습니다. 목소리가 너무 컸던 것 같고, 하지 않아도 될 말을 한 것 같고, 누군가 그 말을 마음에 담아 두었을 것 같았습니다. 확인하면 될 일이었지만, 확인하는 것이 더 무서웠다고 하셨습니다.
몸이 가벼워진 뒤에도 남는 것
술병이 났다고 하면 대개 속이 뒤집히거나 머리가 아픈 몸의 증상을 떠올립니다. 물을 많이 마시고 해장을 하고, 한숨 자고 나면 지나가는 일로 여깁니다. 실제로 몸의 숙취는 시간이 지나면서 줄어듭니다.
그런데 마신 다음 날의 불안과 후회는 몸이 회복되는 속도와 꼭 같이 줄어들지는 않습니다. 속이 가라앉은 저녁이 되어서야 오히려 더 또렷해지기도 합니다. 이런 불편함은 해장만으로는 가라앉지 않습니다.
스스로 가늠해 볼 수 있는 단서가 있습니다. 몸에서 오는 술병은 시간이 지나면서 조금씩 나아집니다. 반면 마신 다음 날의 불안과 후회는 몸이 가벼워진 뒤에도 남아 있거나 저녁 무렵 다시 커집니다. 그 불편함을 넘기려고 또 한 잔을 찾는다면, 그날 힘든 것은 몸의 숙취만이 아닙니다.
다만 술을 마시지 않을 때 손이 떨리거나 식은땀이 나거나, 마신 뒤의 기억이 자주 끊긴다면 먼저 병원에서 몸 상태를 확인해 보는 것이 안전합니다. 이 글에서는 이런 몸의 위험 신호보다, 마신 다음 날 남은 불안과 후회 때문에 다시 술을 찾게 되는 경우를 다룹니다.
저녁이 되면 다시 술이 떠올랐습니다
사람은 불편한 감정을 빨리 덜어 준 행동을 쉽게 반복합니다. 심리학에서는 어떤 상황과 반응이 반복해서 짝지어지며 익숙해지는 과정을 조건화라고 부릅니다. 쉽게 말해, 어떤 행동을 했을 때 불편한 마음이 곧 가라앉는 경험이 반복되면 비슷한 마음이 들 때 그 행동이 먼저 나오기 쉬워집니다.
술도 그런 역할을 할 수 있습니다. 한 잔을 넘겼을 때 조마조마하던 마음이 금세 가라앉는 경험이 반복되면, 비슷한 불편함이 올라올 때 술을 먼저 찾는 반응이 익숙해질 수 있습니다.
문제는 다음 날입니다. 술로 잠시 덮어 둔 불편함이 사라진 것은 아닌데, 여기에 전날 일에 대한 후회까지 더해집니다. 그래서 다음 날 아침에는 마음이 더 무거워집니다.
설거지를 미뤄 본 분이라면 이 흐름을 쉽게 떠올릴 수 있습니다. 저녁에 그릇을 그대로 두면 그날 저녁은 한결 수월합니다. 하지만 다음 날 아침 부엌에 들어가면 어제보다 그릇이 늘어 있습니다. 보기 싫어 또 미루면, 미룰수록 손대기 어려워집니다.
마신 다음 날의 불안과 후회도 비슷하게 쌓입니다. 오늘의 불편함을 술로 넘기면 그 저녁은 지나가지만, 다음 날 아침에는 전날의 불편함에 새로운 후회가 더해집니다. 그렇게 술병이 심한 날일 수록 다시 술을 찾는 흐름이 이어집니다.
다시는 안 마시겠다고 생각한 날
해장국이나 숙취해소제, 물을 마시고 한숨 자는 일은 몸을 추스르는 데 도움이 됩니다. 빠져나간 수분을 채우고 속을 달래는 것은 필요합니다. 병원에서 처방받는 약이나 술 문제를 다루는 상담도 각각 역할이 있습니다. 마시는 양을 줄이고, 몸의 회복과 금단 증상을 살피며, 생활 속에서 술을 멀리할 방법을 함께 찾는 일입니다.
다만 이런 방법들은 주로 이미 마신 뒤의 몸과 생활을 다루는 데 초점이 있습니다. 마신 다음 날 남아 있는 불안과 후회를 다시 술로 덮으려는 반응은 그와 다른 부분입니다. 그 반응이 그대로 남아 있으면 몸이 회복된 뒤에도 다음 술자리에서 같은 일이 되풀이됩니다.
다음 날의 후회가 크면 술을 줄이는 데 도움이 될 것 같지만, 오히려 반대로 작동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후회 자체도 견디기 불편한 감정이라, 그 감정을 다시 덮고 싶은 마음이 커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술을 끊겠다는 결심이 가장 굳어지는 시간과 다시 술을 찾게 되는 시간이 같은 하루 안에 있는 것도 이런 이유입니다.
그렇다면 어디서부터 살펴봐야 할까요. 다시는 그러지 말자는 다짐은 술을 마시기 전의 결심입니다. 그러나 불편한 마음이 올라오는 순간에는 이미 익숙해진 반응이 결심보다 먼저 나옵니다. 최면상담에서는 술을 찾게 되는 순간 어떤 마음과 몸의 느낌이 먼저 올라오는지 살펴보고, 그 반응이 몸에 배던 무렵의 경험과 당시 감당하기 어려웠던 감정까지 함께 다룹니다.
소파 밑으로 들어간 안경
그분은 술을 마신 다음 날 아침 눈을 뜨면 명치가 뻐근하게 뭉친다고 하셨습니다. 최면이 깊어진 뒤 그 뭉친 느낌을 그대로 느껴 보도록 하자, 뜻밖의 장면이 떠올랐습니다.
아직 기저귀를 떼기 전 무렵의 거실이었습니다. 아이가 어른의 안경을 얼굴에 걸쳐 보다가 손에서 놓쳤습니다. 안경을 주워 보니 다리 한쪽이 바깥으로 휘어 있었습니다. 그때 현관 쪽에서 어른의 발소리가 들렸습니다.
아이는 안경을 소파 밑으로 밀어 넣었습니다. 손이 닿는 데까지 깊숙이 밀어 넣은 뒤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앉았습니다. 그날 저녁 집 안에서는 한동안 안경을 찾느라 소란이 벌어졌습니다. 아이는 그 소리를 등지고 앉아 텔레비전만 보고 있었습니다.
안경이 어떻게 휘었는지는 그 장면에서도 끝내 또렷해지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안경을 소파 밑으로 밀어 넣던 순간은 선명했다고 합니다. 손끝이 바닥에 쓸리던 감각과, 안경을 밀어 넣고 나자 조마조마하던 가슴이 잠깐 가라앉던 느낌까지 남아 있었습니다.
어른의 눈에는 아이가 안경 하나를 숨긴 일에 불과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아직 사정을 말로 설명하기 어려운 아이에게는 다른 반응도 함께 익었습니다. 감당하기 어려운 일이 생기면 말하는 대신 보이지 않는 곳으로 치우고, 그러면 당장은 조용해진다는 반응이었습니다.
어른이 된 뒤에도 비슷한 방식이 이어졌습니다. 회식에서 마음이 불편해지면 술잔을 들었고, 다음 날 아침 후회가 밀려오면 그 후회도 저녁의 술로 덮었습니다.
최면 속에서 그분은 다시 그 거실 장면으로 들어갔습니다. 소파 앞에 쪼그려 앉은 아이 옆에 앉아, 밀어 넣은 안경을 함께 꺼내자고 했습니다. 아이가 팔을 넣어 안경을 더듬는 동안 곁에서 기다렸습니다.
아이는 꺼낸 안경을 두 손에 쥔 채 한참 서 있었습니다. 그러다 어른 앞으로 걸어가 안경을 내밀었습니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아이가 그제야 참았던 숨을 내쉬는 모습까지 보고 나서 장면을 마무리했습니다.
다음 날 아침에 먼저 건 전화
요즘 그분은 술자리가 있었던 다음 날 아침이면 휴대전화부터 집는다고 하셨습니다. 예전에는 휴대전화를 엎어 둔 채 하루가 다 가도록 화면을 열어 보지 않았습니다.
며칠 전에는 팀 회식 다음 날 선배에게 먼저 전화를 걸어, 어제 자기가 목소리가 컸던 것 같다고 말했다고 합니다. 선배는 그런 일 없었다며 웃고 넘겼습니다. 통화는 일 분도 걸리지 않았습니다. 그날 저녁에는 편의점 앞을 그냥 지나쳐 집으로 걸어갔다고 하셨습니다.
술병은 몸의 숙취로만 끝나지 않는 경우가 있습니다. 어제 일이 떠오르는 것이 싫어 휴대전화를 엎어 두고, 저녁이 되면 그 불편함을 다시 한 잔으로 넘기고 계신다면 의지가 약해서가 아닙니다. 불편한 마음이 올라오는 순간 술을 먼저 찾도록 익은 반응이 작동한 것입니다.
그 반응은 다짐으로만 눌러 두기보다, 처음 그렇게 익게 된 경험과 함께 다룰 때 달라집니다. 내일 아침을 또 같은 방식으로 보내지 않으려면 살펴볼 것은 어제 마신 술만이 아니라, 그 술을 다시 찾게 만드는 반응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