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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젯밤에 무슨 말을 했는지 다 기억납니다. 기억이 나서 더 괴로워요.
후배한테 목소리를 높이던 장면이 자꾸 떠오릅니다. 저는 평소에 싫은 소리 한마디 못 하는 사람이에요.
아침에 눈뜨면 속이 뒤집히고 손이 떨리는데, 그것보다 휴대전화 켜는 게 더 무섭습니다."
이야기를 들려주신 분은 마흔 초반의 남성입니다. 상담 신청서 첫 줄에는 술버릇을 고치고 싶다고만 적혀 있었습니다. 회사에서는 조용한 사람으로 통한다고 하셨습니다. 회의에서 억울한 말을 들어도 그때는 웃고 넘긴다고 합니다. 그런데 회식에서 술이 몇 잔 넘어가면 목소리가 커지고 말끝이 거칠어지면서, 하지 않아도 될 말까지 나온다고 하셨습니다.
필름이 끊기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다음 날 아침이면 자신이 한 말이 토막토막 떠올라 이불을 뒤집어썼습니다. 사과 문자를 보내고 다시는 안 마시겠다고 다짐하지만, 또 술자리에 앉으면 같은 일이 되풀이됐습니다.
주변에서는 술버릇이라고 했습니다. 술만 마시면 변하는 사람이라는 말도 여러 번 들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본인이 가장 무서웠던 것은 따로 있었습니다. 취중진담이라는 말처럼, 술자리에서 한 말이 사실은 자기 본심이면 어쩌나 하는 생각이었습니다. 평소의 자기가 가짜이고 술 마신 자기가 진짜라면 앞으로 사람들을 무슨 얼굴로 봐야 하나 싶었다고 하셨습니다.
마신 양보다 그날 낮이 알려 주는 것
여기서 한 가지 되짚어 볼 것이 있습니다. 술만 마시면 변한다고 해서 마실 때마다 늘 같은 일이 벌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비슷한 양을 마시고도 웃으며 들어오는 날이 있고, 유난히 감정이 터지는 날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날 밤의 차이를 만든 것이 술의 양만은 아닐 수 있습니다. 최근의 술자리 몇 번을 떠올리면서, 유난히 터졌던 날 낮에 참고 넘긴 일이 있었는지 비교해 보시면 됩니다. 주량보다 그날 낮에 있었던 일이 더 잘 맞아떨어진다면, 술 말고 먼저 살펴볼 것이 있다는 뜻입니다.
무릎으로 눌러 지퍼를 잠근 가방
이런 흐름을 설명할 때 쓰는 말이 억압입니다. 불편한 감정이 올라와도 밖으로 드러내지 않고 안으로 눌러 두는 것을 말합니다. 참는 것은 감정이 있다는 것을 알면서 표현을 미루는 일이지만, 억압은 불편한 감정 자체를 밀어내다 보니 자신도 무엇을 느끼는지 잘 알아차리지 못하는 상태에 가깝습니다.
여행 가방을 떠올려 보시면 됩니다. 넣을 것이 많은 날에는 옷을 밀어 넣고 무릎으로 눌러 가며 지퍼를 잠급니다. 겉에서 보면 멀쩡히 닫힌 가방입니다. 하지만 안에서는 계속 밖으로 밀어내는 힘이 걸려 있어, 지퍼를 놓는 순간 안에 있던 것이 한꺼번에 쏟아집니다.
술은 그 지퍼를 붙잡고 있던 힘을 느슨하게 만드는 역할을 합니다. 스스로를 다잡는 힘이 약해지면 평소에는 나오지 않던 말과 감정이 밖으로 드러납니다. 그래서 술만 마시면 변하는 사람에게 없던 성격이 새로 생기는 것이 아닙니다. 원래 있었지만 표현하지 못했던 말과 감정이 한꺼번에 나오는 쪽에 가깝습니다.
한꺼번에 쏟아진 감정에는 순서가 없습니다. 어젯밤 후배에게 한 말도 그 후배 때문에 생긴 감정만은 아닐 수 있습니다. 오래전 회의에서 삼킨 말과 그보다 앞서 참고 넘긴 일까지 뒤섞여 나올 수 있습니다.
술자리에서 나온 말이 자기 본심 같지 않게 느껴지는 것도 이 때문입니다. 그 말은 지금의 판단이라기보다 오래 미뤄 둔 감정이 한꺼번에 밀려 나온 결과에 가깝습니다.
주량을 줄여도 남아 있는 것
이쯤 되면 대개 주량부터 조절합니다. 독한 술을 피하고, 술자리를 일찍 나오고, 아예 몇 달 동안 술을 끊어 보기도 합니다. 마시는 양이 줄면 터지는 횟수도 줄기 때문에 이런 방법은 분명 도움이 됩니다.
몸이 힘들거나 감정 기복이 심할 때는 병원 진료가 도움이 되기도 합니다. 술을 줄이는 과정을 의료진과 함께 관리하는 것이 필요할 수도 있습니다. 다만 낮 동안 말을 삼키는 방식이 그대로라면 감정은 계속 쌓입니다. 다음 술자리에서 쏟아질 감정도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그렇다면 삼키지 말고 그때그때 말하면 되지 않느냐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막상 그런 순간이 오면 목까지 올라온 말이 저절로 내려갑니다. 무엇을 말할지 고르는 것은 의식이지만, 말하려는 순간 입을 다물게 하는 것은 그보다 빠른 무의식의 자동반응입니다. 그래서 다짐만으로는 잘 바뀌지 않습니다.
최면상담에서는 이 자동반응을 다룹니다. 말을 삼킬 때 몸에서 어떤 반응이 일어나는지 먼저 확인하고, 그 반응이 언제 처음 만들어졌는지, 그때 표현되지 못한 감정이 무엇이었는지까지 함께 살펴봅니다.
손님이 오던 저녁의 안방
이분에게 먼저 물은 것도 말을 삼키던 순간의 몸 상태였습니다. 하고 싶은 말을 삼킬 때면 목젖 아래가 조이면서 숨이 짧아진다고 하셨습니다. 최면이 충분히 깊어지자 그 조이는 느낌이 다시 올라왔고, 뒤이어 오래전 어느 저녁 장면이 떠올랐습니다.
집 거실입니다. 손님이 와 있고 어른들이 둘러앉아 이야기를 나눕니다. 말이 아직 서툰 아이가 무언가를 손에 쥔 채 어른 옆으로 다가가 팔을 잡아끕니다. 어른은 이야기를 멈추지 않은 채 아이의 손을 가만히 옆으로 밀어 놓습니다. 손에 있던 것이 바닥으로 떨어지지만 아무도 그것을 줍지 않습니다.
아이는 울지 않습니다. 입을 다물고 서 있다가 뒤로 물러납니다. 그러고는 혼자 안방으로 들어가 문을 밀어 닫습니다. 방 안에서 아이는 개켜 둔 이불과 베개를 방바닥으로 밀어 떨어뜨립니다. 소리는 내지 않습니다.
잠시 뒤 아이는 방문을 열고 나옵니다. 아무 일도 없었던 얼굴로 거실 한쪽에 앉습니다. 어른들의 이야기는 그대로 이어집니다.
그날 손님이 누구였는지, 아이가 쥐고 있던 것이 무엇이었는지는 장면 속에서 또렷해지지 않았습니다. 이 장면을 이야기하는 동안 이분은 의자 밑에서 한쪽 발뒤꿈치를 계속 들었다 놓았습니다. 그 발이 멈춘 것은 장면이 끝난 뒤였습니다.
여기서 눈여겨볼 것은 아이가 참았다는 사실보다, 참은 뒤 혼자 방으로 들어갔다는 점입니다. 감정을 없앤 것이 아니라 사람이 없는 곳으로 가서 혼자 드러낸 것입니다. 이런 방식이 몸에 익으면 어른이 되어서도 감정을 바로 표현하지 못하고, 터놓아도 괜찮다고 느껴지는 순간까지 미루게 됩니다.
장면 속에서 이분은 다시 그 거실로 들어갔습니다. 바닥에 떨어진 것을 아이 손에 쥐여 주고, 아이 옆에 서서 어른들 쪽으로 함께 걸어갔습니다. 아이가 하려던 말을 할 때까지 기다렸고, 어른들이 이야기를 멈추고 아이 쪽을 볼 때까지 곁을 지켰습니다.
아이는 떨어졌던 것을 다시 내밀고 몇 마디를 했습니다. 그날 아이는 안방으로 들어가지 않고 어른들 사이에 그대로 앉아 있었다고 하셨습니다.
회식 자리에서 곧바로 한 말
요즘 이분은 회의에서 억울한 말을 들으면 그때 한마디를 한다고 하셨습니다. 지난 회식에서도 팀장이 이분이 맡았던 일을 다른 사람의 공으로 말하자 잔을 내려놓고, “그 부분은 제가 진행했던 일입니다”라고 짚었다고 합니다. 목소리를 높이지도 않았고, 그 뒤로 술자리는 평소처럼 이어졌습니다.
집에 들어와서는 휴대전화를 확인하지 않고 그대로 잤다고 하셨습니다. 형에게 전화를 걸어 오래전부터 담아 두었던 이야기를 술 없이 꺼냈다고도 하셨습니다.
술만 마시면 변하는 사람 안에 두 사람이 들어 있는 것은 아닙니다. 낮에 삼킨 말이 사라지지 않고 남아 있다가, 스스로를 다잡는 힘이 느슨해지는 순간에 한꺼번에 나오는 것입니다.
오늘 낮에도 하려던 말을 그냥 넘기셨다면 그 말은 없어진 것이 아닙니다. 다음 술자리까지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어젯밤 자신이 한 말 때문에 아침마다 휴대전화 켜기가 두렵다면, 술의 양보다 먼저 살펴볼 것은 말을 삼키게 만드는 반응이 언제부터 시작됐는지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