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딱 본전만 찾고 일어나자고 했어요. 그 생각만 몇 시간을 했습니다.
손은 떨리고 입은 바짝 마르는데 화면에서 눈을 못 떼겠더라고요. 새벽에 폰을 껐을 때는
처음 잃은 돈의 몇 배가 없어져 있었습니다. 그런데 제일 무서운 건 그게 아니라
다음 날 아침에 또 언제 할까부터 생각하고 있는 저였어요."
사십 대 초반 남성분이 상담 첫날 들려주신 이야기입니다. 이 글은 도박을 끊는 요령을 알려 드리는 글이 아닙니다. 왜 잃을수록 다음 판을 더 크게 기다리게 되는지, 그리고 도박중독 치료에서 그 기다림을 어떻게 다루는지를 이야기하려 합니다.
그분은 몇 달째 잠을 제대로 못 잤습니다. 눕기만 하면 마지막 판이 다시 돌아가고, 새벽 서너 시에 눈이 떠지면 속이 꽉 막힌 것 같았다고 합니다. 밥을 먹다가도 울렁거려 수저를 놓는 날이 늘었습니다.
정신 차리라는 말은 주변에서 숱하게 들었습니다. 본인도 그 말이 맞다고 생각했습니다. 각서도 썼고, 계좌와 카드는 형에게 맡겼고, 휴대전화에서 앱을 지운 것도 여러 번입니다. 그런데 며칠이 지나면 손이 다시 그 화면을 찾고 있었습니다. 그럴 때마다 스스로가 사람 같지 않게 느껴졌다고 하셨습니다.
돈을 잃는 게 그렇게 괴로우면 안 하면 될 텐데, 왜 잃고 나서 더 하게 되는 걸까요.
따고 있을 때 일어나 본 적이 있습니까
자기 상태를 가늠해 볼 단서가 하나 있습니다. 지금까지 도박을 하면서 따고 있는 상태에서 스스로 일어난 적이 있는지 떠올려 보시면 됩니다. 돈이 목적이라면 딴 날에는 기분 좋게 일어나는 것이 맞습니다.
그런데 따는 날에도 끝내 일어나지 못하고 돈이 다 떨어져야 끝난다면, 붙잡고 있는 것은 돈이 아니라 다음 판을 기다리는 마음일 수 있습니다. 이 단서 하나로 무엇을 단정할 수는 없지만, 지금 자신이 어디쯤 와 있는지 짚어 보는 데는 도움이 됩니다.
시간표가 없는 정류장
어떤 행동이 몸에 붙는 방식을 설명할 때 간헐 강화라는 말을 씁니다. 좋은 결과가 매번 주어질 때보다 어쩌다 한 번 불규칙하게 주어질 때 그 행동이 훨씬 강하게 학습된다는 뜻입니다. 언제 올지 알 수 없기 때문에 오히려 더 오래 매달리게 됩니다.
버스 시간표가 붙어 있는 정류장을 떠올려 보시면 됩니다. 다음 차가 몇 시에 오는지 알면 잠깐 편의점에 다녀올 수도 있고, 오늘은 그냥 걸어가자고 마음먹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언제 올지 모르는 정류장에서는 그게 안 됩니다. 방금 지나갔을 수도 있고 일 분 뒤에 올 수도 있으니 목을 빼고 도로 끝만 보게 됩니다. 걸어가는 순간 바로 차가 올 것 같기 때문입니다.
도박이 사람을 붙잡는 방식이 이와 닮았습니다. 잃은 시간이 길어질수록 기대가 줄어드는 것이 아니라, 이제 슬슬 올 때가 됐다는 마음이 커집니다. 본전 생각은 계산이 아니라 이 기다림의 다른 이름입니다.
그분도 잃은 다음 날이 가장 위험했다고 하셨습니다. 딴 날은 오히려 그날 저녁에 잠이 왔는데, 잃은 날은 사흘이고 나흘이고 머릿속에서 판이 돌아갔다고 합니다.
앱을 지워도 며칠이면 다시 깔린다
이런 상태에서 가장 먼저 하는 일은 도박을 할 수 없게 주변을 정리하는 것입니다. 계좌와 카드를 믿을 만한 사람에게 맡기고, 접속을 차단하고, 도박중독치료센터나 도박치료센터를 찾아 상담과 자조모임을 병행하기도 합니다. 이런 조치는 실제로 필요합니다. 충동이 올라와도 바로 손댈 수 없게 해 두면 그 고비를 넘길 시간을 벌 수 있습니다. 같은 문제를 겪는 사람들 사이에서 혼자가 아니라는 것을 확인하는 일도 회복에 큰 힘이 됩니다.
잠이 안 오고 불안이 심하면 병원에서 약을 쓰기도 합니다. 약은 올라온 충동과 불안을 낮춰 그 밤을 넘기는 데 도움이 됩니다. 이 방법들은 도박에 손대기 어렵게 만들거나, 이미 올라온 충동을 가라앉히는 쪽으로 주로 작용합니다. 정작 별일 없는 저녁에 다음 판을 기다리는 마음이 저절로 켜지는 것은 그대로 남습니다.
그분은 이 대목을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안 할 수는 있는데, 안 기다려지지가 않아요."
하지 않겠다고 정하는 것은 의식이 하는 일입니다. 그런데 저녁이 되면 저절로 그쪽으로 기울어지는 마음은 의식이 정해서 켜는 것이 아닙니다. 오래전에 몸에 익어 지금은 본인 허락 없이 먼저 켜지는 무의식의 자동반응에 가깝습니다. 그래서 결심을 아무리 여러 번 새로 해도 같은 저녁이 오면 처음으로 되돌아갑니다.
최면상담에서는 이 자동반응을 다룹니다. 지금 판을 기다릴 때 올라오는 느낌을 따라가, 같은 기다림이 처음 만들어진 무렵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찾아 다룹니다.
현관 소리를 기다리던 아이
그분에게 도박 생각이 가장 강하게 올라올 때 몸에서 먼저 느껴지는 것이 무엇인지 물었습니다. 판이 시작되기를 기다릴 때면 명치부터 가슴 가운데까지 뜨거워지고, 무언가 곧 일어날 것 같은 느낌이 든다고 하셨습니다.
깊은 최면 상태에서 그 느낌에 집중하자 세 살 무렵의 집 안이 떠올랐습니다. 저녁이 되면 아이는 거실에서 현관 쪽을 자주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아버지가 일 때문에 늦게 들어오는 날이 많았는데 언제 돌아올지는 알 수 없었습니다. 어떤 날은 아이가 잠들기 전에 들어왔고, 어떤 날은 다음 날 아침에야 얼굴을 볼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아버지가 일찍 들어오는 날이면 분위기가 달라졌습니다. 현관문이 열리고 아버지가 들어오면 아이는 달려갔습니다. 아버지는 아이를 안아 올려 주기도 했고, 잠깐이라도 함께 놀아 주었습니다. 그래서 저녁이 되면 아이는 작은 소리에도 현관을 바라봤습니다. 복도에서 발소리가 들리거나 문 여는 소리가 나면 가슴이 먼저 뛰었습니다.
‘아빠 왔나?’
아니면 다시 기다렸습니다. 언제 올지는 몰랐지만 가끔 정말 문이 열렸기 때문에 기다림은 쉽게 끝나지 않았습니다.
깊은 최면 상태에서 어른이 된 그분은 현관을 바라보고 있는 어린 자신에게 다가갔습니다. 아이를 안아 주면서 아버지가 지금 들어오지 않아도 괜찮다고 알려 주었습니다. 아버지가 늦는 것은 아이 때문이 아니고, 현관 소리를 계속 확인하며 기다리고 있지 않아도 안전하다고 말해 주었습니다.
그리고 이번에는 어른이 된 자신이 아이 곁에 함께 있는 상태에서 그 저녁을 다시 지나가 보았습니다. 복도에서 소리가 들렸지만 아이는 전처럼 바로 현관으로 달려가지 않았습니다. 아버지가 아직 오지 않았다는 것을 알고도 어른이 된 자신의 품에 그대로 있었습니다. 가슴에 올라오던 뜨거운 느낌도 한결 가라앉았습니다.
상담에서는 이렇게 지금 도박을 기다릴 때 올라오는 감정과 신체반응을 따라가, 그 반응과 연결된 오래된 경험을 찾아 다시 다뤘습니다.
판의 결과와 어린 시절의 아버지는 전혀 다른 대상입니다. 하지만 그분에게는 언제 올지 모르는 것을 기다리면서 가슴이 뛰고, 그것이 왔을 때 크게 안도하는 반응이 오래전부터 익숙한 감정으로 남아 있었습니다. 그 감정과 자동반응을 다시 다루면서, 아무 일도 없는 저녁이면 저절로 다음 판을 기다리던 반응도 함께 달라지기 시작했습니다.
월급날 저녁에 통장을 꺼내 놓는 사람
상담 이후 그분은 월급이 들어오는 날이면 아내와 함께 통장을 확인한다고 하셨습니다. 남은 빚이 얼마인지 있는 그대로 말하기까지는 시간이 조금 걸렸습니다.
예전에는 빚을 마주하기보다 ‘한 번만 더 해서 메우면 된다’는 생각으로 다시 도박을 찾았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잃은 돈을 도박으로 되찾으려 하기보다, 남아 있는 빚을 현실에서 하나씩 정리해 가고 있다고 했습니다.
지난 주말에는 조카 생일이라 처가에도 다녀왔다고 합니다. 예전 같으면 사람들을 만나는 것이 불편해 봉투만 보내고 가지 않았던 자리였습니다. 밤에는 휴대전화를 거실 충전기에 두고 방으로 들어갑니다. 예전에는 잠들기 직전까지 화면을 확인했고, 새벽에 눈이 뜨면 다시 도박 생각부터 났다고 했습니다.
도박을 반복하게 만드는 이유는 사람마다 다릅니다. 이분에게는 언제 올지 모르는 결과를 계속 기다리며 긴장하고, 결과가 찾아오는 순간 크게 풀리는 반응이 오래전 경험과 연결되어 있었습니다. 상담에서는 그 오래된 기다림과 긴장을 깊은 최면 상태에서 다시 다뤘습니다. 그 반응이 달라지면서 별일 없는 저녁마다 다음 판을 기다리던 마음도 예전처럼 강하게 올라오지 않았다고 합니다.
본전을 되찾고 싶다는 생각 때문에 계속 도박으로 돌아가고 있다면, 단순히 의지가 약하다고만 볼 필요는 없습니다. 도박을 생각할 때 가장 먼저 올라오는 감정과 몸의 반응이 무엇인지, 그리고 그 반응이 어디에서 시작되었는지를 함께 살펴볼 수 있습니다.










